조성환 (흥사단)
조성환(曺誠煥, 1885년 9월 10일~1968년 2월 29일)은 흥사단(興士團) 등에서 종사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출신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호(號)는 태야(台冶).
조성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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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5년 9월 10일 조선 경상도 김해군 태야면 분절리 |
사망 | 1968년 2월 29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82세)
국적 | 대한민국 |
거주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
본관 | 창녕(昌寧) |
학력 | 한성계동보통학교 2학년 중퇴(1898년 5월) |
직업 |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
경력 | 북미실업회사 감사국 감사원 흥사단 총무위원 겸 감사위원 한국독립당 고문 겸 당무위원 |
부모 | 조시욱(부) 강릉 유씨 첩실(모) 창녕 성씨 부인(적모) 함평 정씨 첩실(서모) 원주 원씨 첩실(서모) |
형제 | 조정환(이복 서형) |
정당 | 무소속 |
웹사이트 | 조성환(독립유공자 공훈록) |
생애
편집경상도 김해 부농가 댁의 서얼 후손으로, 1907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 운동 자금 등을 지원했던 그는 1907년부터 이듬해 1908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상항지방회 학무, 구제 관련 업무 등을 담당하였으며, 1909년부터 이듬해 1910년까지 대한인국민회 미국 로스앤젤레스 지역지회 평의원(1909)과, 법무원(1910)을 거쳐, 동회 북미지역총회 학무원(1911~1912), 나성지역지회 대의원(1913)과, 북미실업회사 감사국 감사원(1917)으로 활동하였다. 만주(滿洲)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단원으로 활동했었던 조정환(曺正煥)의 배다른 서얼 아우(異服 庶弟)인데, 만주(주로 지린 및 진저우) 및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륙 본토(주로 항저우 및 쑤저우·베이핑·난징·상하이)에서 독립 운동을 전개한 배다른 서얼 형(조정환(曺正煥), 異服 庶兄)과는 달리 미주를 무대로 활동하였고, 1899년 하와이(호놀룰루)로 이주했다가, 1902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새크라멘토)로 재차 거처를 옮겼다. 1907년에 그(조성환)는 안창호(安昌浩) 등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 공립협회에 가입해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학무(學務)로 선출됐고, 이듬해에는 구제(救濟)를 맡았다. 1909년부터는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로 자리를 옮겨 평의원(1909), 법무원(1910), 대의원(1913) 등을 역임했다. 1911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의 학무원이 됐고, 1914년 7월 17일에는 안창호 주도의 독립운동단체였던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하여 흥사단 총무위원 겸 감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1917년 1월에는 흥사단 단원과 대한인국민회원들이 주주로 참여한 북미실업회사에서 감사국의 감사원을 역임했다. 북미실업회사는 주식회사를 통해 적립된 자본으로 독립운동자금을 항시적으로 확보하고, 중국(중화민국 대륙 본토)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그 외에도 그는 1907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학력
편집가계
편집사후
편집2020년 3월 1일,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이 추서되었다.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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