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중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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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중심설(地球中心說, 영어: Geocentrism)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모든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돈다는 학설이다. 천동설(天動說)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주론은 크게 나누어, 에우독소스가 고안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에 받아들여진 동심천구가설과 프톨레마이오스 천동설의 두 종류가 있다. 단순히 천동설이라고 하면 마지막으로 체계를 완성시킨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지동설에 의해서 이 견해는 오류로 판명되었다.
개요
편집2세기에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체계화되었으며, 지동설과 대비되는 학설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점 때문에 지구중심설이라고도 하는데, 지구가 움직이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엄밀하게는 다른 개념이며, 천동설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모델(Geocentric model)'의 번역어로는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있다. 중국어로는 '지심설'(地心說)이라고 한다. 반구형의 세계의 중심에 인간이 살고있다는 세계관과 천동설은 엄격하게 구분된다.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기독교 사회에서 널리 공인된 세계관이었다.
오랜 옛날부터 많은 학자들이 우주의 구조에 대해 생각해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에우독소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고 모든 천체가 지구 주위를 공전한다고 주장했지만, 에크판토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지만 자전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필롤라오스(Philolaus)는 지구도 태양도 우주의 중심은 아니지만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아리스타르코스는 우주의 중심에 있는 태양 주위를 지구가 공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학설에서 더 확실한 것을 모아 체계화한 사람이 프톨레마이오스다. 히파르코스의 논제에 개량을 더한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확증은 없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설을 주창한 학자는 이전부터 있었고, 행성의 위치계산을 비교적 정확하게 한 사람도 그 이전에 있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체계화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로, 지금도 이 형태의 천동설을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라고 부른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는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태양을 비롯한 모든 천체는 약 하루에 걸쳐 지구 주위를 공전한다. 그러나 태양이나 행성의 공전속도는 각기 다르고, 그러한 이유로 시기에 따라 보이는 행성이 다르다. 천구는 딱딱한 구체이며, 이것이 지구와 태양, 행성을 포함한 모든 천체를 감싸고 있다. 항성은 천구에 붙어있거나 천구에 뚫린 미세한 구멍으로 천구 밖의 빛이 새어나와 보이는 것으로 여겨졌다. 행성과 항성은 신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움직인다. 모든 변화는 지구와 달 사이에서만 일어나고, 더 멀리 있는 천체는 정기적인 운동을 반복할 뿐, 영원히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천동설은 단순한 천문학적인 계산방법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당시의 철학이나 사상이 담겨있었다. 신이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둔 것은 그것이 인간이 사는 특별한 천체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임과 동시에 모든 천체의 주인이기도 하다. 모든 천체는 지구의 종이며, 주인을 따르는 형태로 운동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였던 중세 기독교 신학에 부합하였기에 천동설을 공식적인 우주관으로 간주했다. 14세기에 발표된 단테의 신곡 천국편에서는 지구 주위를 달, 태양, 목성 등의 행성이 있는 하늘이 동심원 모양으로 둘러싸고있고, 그 위에는 항성이 있는 하늘, 보다 멀리서 움직이는 하늘, 가장 높은 하늘을 볼 수 있다.
또한 천동설은 당시에는 관측사실과 정합성에서도 지동설보다 우위에 있었다. 만약 지동설이 사실이라면, 항성의 연주시차가 관측되어야한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로는 그것을 관측할 수 없었다.
역사
편집에우독소스의 동심천구
편집기원전 4세기에 고대 그리스의 에우독소스는 우주의 모습이 지구를 중심으로 여러층으로 겹친 천구가 감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바깥쪽의 천구는 항성이 아로새겨진 항성구로, 하늘의 북극을 축으로 하여 약 하루에 걸쳐 동쪽에서 서쪽으로 회전하여 일주운동이 일어난다.
태양이 포함된 천구는 항성구에 대해 반대방향으로, 1년에 걸쳐 서쪽에서 동쪽으로 회전하여 연주운동이 일어난다. 태양의 회전축은 항성구의 회전축에 대해 기울어져있기 때문에, 1년동안 남중고도가 변하고 계절이 바뀌는 것이 설명된다.
항성구와 태양 사이에 행성이 운행하는 천구를 뒀다. 지구에서 볼 때 행성은 별자리 사이를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항성구에 대한 행성구의 상대운동으로 설명되었지만, 행성은 천구에서 속도를 바꾸거나 역행하는 한 시기동안 반대로 움직일 수 있다. 역행을 설명하기 위해 행성 하나의 운행에 회전방향과 속도가 다른 여러개의 천구가 고안되었다. 이 천구는 확실히 지구를 공통중심으로 하는 구형이기 때문에, 지구에서 각 행성까지의 거리는 변하지 않는다. 에우독소스의 동심천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포함되었다.
아폴로니우스의 주전원
편집기원전 3세기 무렵의 아폴로니우스와 기원전 2세기의 히파르코스는 행성이 단순히 원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 위에 있는 작은 원 위를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이 작은 원을 주전원, 큰 원을 대원(Deferent)이라고 부른다. 두 가지 이상의 원운동이 합해져 행성의 진행방향이나 속도가 변화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행성의 접근에 의한 밝기 변화, 순행과 역행의 속도차이를 대략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행성이 동일한 평면에 있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원궤도를 등속운동하고 있는 경우, 지구에서 본 행성의 운동은 원궤도와 하나의 주전원만으로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행성 운동은 그렇게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행성의 운동을 천동설에서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서는 보다 복잡한 체계가 필요해진다. 따라서 히파르코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를 시작으로 다양한 천동설 모델이 제창되었고, 결국에는 지동설의 코페르니쿠스, 케플러를 거쳐,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른 우주 모델에 이르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편집2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프톨레마이오스는 주전원을 도입하면서 이심원과 동시심(Equant)을 도입하여 체계화했다. 항성구의 중심은 지구지만, 행성의 대원의 중심은 이와 다른 곳에 위치한다. 대원의 중심이 항성구의 중심에서 벗어나있기에, 대원을 이심원이라 한다. 주전원의 중심은 이심원에는 일정한 속도로 돌지 않지만, 동시심에서 이것을 보면 일정한 회전속도로 움직인다.
옆의 그림은 비교적 간단한 예시지만, 그림에는 커다란 이심원과 작은 주전원 외에, 이심원의 중심의 운동, 항성구의 일주운동, 동시심을 중심으로하는 각도와 같은, 하나의 행성 운행에 대한 다섯개의 움직임이 얽혀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는 지구에서 행성까지의 평균 거리에 상당하는 이심원의 지름을 어떻게 잡는다고 해도, 보는 방향이 같으면 주전원을 만들 수 있다. 우선 각 행성의 주전원이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지구에서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의 순서로 둔다. 그 바깥을 항성구가 둘러싼다. 이 우주관은 에우독소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심천구의 확장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는 당시로서는 매우 뛰어난 것이며, 지구를 중심으로 가정하여 행성 및 태양의 운동을 설명하는데 더이상의 것은 없을 정도다. 만약 태양계의 행성 운동이 모두 타원이 아니라 원운동이었다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행성의 운행을 거의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후에 밝혀진대로, 사실 행성은 태양을 초점 중의 하나로 두는 타원운동을 하고 있으며, 이후의 천동설은 타원운동을 원운동으로 설명하기 위한 방향으로 발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편집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정리한 알마게스트는 중세 이슬람 세계를 거쳐 중세 유럽에 전달되어 약 1500년간 교과서적인 권위를 가졌다. 한편 6세기에 인도의 아리아바타는 태양 중심의 지동설에 근거한 것으로 추측되는 몇 가지 계산을 남겼다. 인도에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이 들어와있었으며, 그 영향이 있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의 저작은 8세기에 아랍어로, 13세기에는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8세기에 아바스 왕조가 건설한 바그다드에는 헬레니즘 문명과 문화가 계승되어 인도 문명과 만다는 도가니였으며, 이슬람 과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9세기 무렵 시리아 지방에서 활약한 알바타니(Al Battani)는 자세한 관측을 바탕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계승, 발전시켰다.
14세기 우마이야 왕조의 다마스쿠스에 있던 이븐 알 샤티르(Ibn Al Shatir)는 천동설의 입장에서 동시심을 제거하여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체계를 생각했다. 원운동에서 직선왕복운동을 일으키는 방법은 그에 앞서 13세기의 나시르 알 딘 알 투시(Nasir al-din al-Tusi)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들의 업적이 코페르니쿠스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지적되지만, 그것을 입증하는 기록은 없다.
유럽에서의 수용과 전개
편집십자군 원정과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레콘키스타, 지중해 무역 등은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접촉이 활발하게 했다. 11~13세기에 걸쳐 이슬람 과학의 성과는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 톨레도 등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번역이 이루어져 12세기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저술한 고대 그리스 문헌도 아랍어 번역을 중역한 형태로 유럽에 소개되었다. 지금까지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 등 라틴 교부에 의한 신플라톤주의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1210년 파리의 성직자 회의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등 새로 유입된 지식을 도입하는데 저항은 있었지만, 13세기 후반에 활약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의해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스콜라 철학의 주류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도 받아들여져, 13세기에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10세에 의해 편찬된 『알폰소 천문표』는 나중에 보정을 받으면서도 17세기까지 유럽에서 사용되었다. 15세기 독일에서 프톨레마이오스 등에 대한 연구를 했던 레기오몬타누스의 업적은 그의 사후 1496년에 『 알마게스트 강요』로 간행되었고 코페르니쿠스의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무렵에는 『알마게스트』도 아랍어를 중역한 것이 아닌, 그리스어 원전을 접할 수 있었다.
16세기 유럽에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창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를 포함한 행성이 공전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며, 동시심을 배제하고 모든 천체의 운행을 크고작은 등속원운동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원운동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천동설과 동일했다. 실제로는 타원운동을 하는 행성의 운동을 원운동으로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계산에 드는 수고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고, 예측 정확도도 크게 오르지는 않았다. 지구의 위치가 이동한다면 그에 따라 별의 위치가 변한 것처럼 보이는 연주시차가 발생해야하는데, 당시의 관측 정밀도로는 그것을 관측할 수 없었던 것도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계승하여 에라스무스 라인홀드가 『프로이센 항성목록』을 작성했지만, 주전원의 수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보다 늘려버려 계산을 복잡하게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의 영향을 받아 17세기의 튀코 브라헤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달과 지구를 제외한 모든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도는 우주를 구상했다. 튀코의 태양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의 발전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도 태양계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내행성인 수성과 금성의 이심원 회전각은 태양과 동일했지만, 외행성은 다르게 취급되었다. 내행성을 지구에서 보면 태양에서 어느 정도 이상은 떠나지 않고, 외행성은 태양의 반대쪽으로도 회전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는 지구에서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을 차례로 겹쳐놓았다. 튀코는 태양 주위를 수성과 금성이 회전하게 했다. 외행성의 경우에는 이심원과 주전원의 크기가 반전되었으며, 지름이 커진 주전원끼리 원래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이심원끼리 겹쳐져있었던 것처럼 겹치게 되었다.
16세기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창한 뒤에도 천동설을 위협하는 사건은 계속되었다. 신성이 관측되어 별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달보다 먼거리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우주관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또한 튀코 브라헤가 혜성을 관측하여 달보다 먼 곳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격렬한 논쟁을 낳았다. 대부분은 혜성을 기상현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