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릉 (조선)
조선 익조의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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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편집함경남도 안변군 서곡면 능리에 있는 익조 이행리의 능이다. 익조는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이다.[1] 그가 사망한 해는 불분명하며, 단지 음력 9월 10일라는 것만 기록되어 있다. 사후 안변부 서곡현 봉룡역 북동에 무덤을 마련하였다.[2]
조선 개국 직후인 1392년(태조 원년) 음력 8월 8일 태조가 자신의 4대조를 추존하고, 아들 이방원을 보내 각 무덤에 치제를 하고 능호를 올렸다. 이때 익조의 무덤에는 지릉(智陵)의 능호가 올려졌다.[3] 또 이 해 음력 10월 28일에는 능지기 권무 2명과 수릉호를 몇 호 두고, 재궁도 세웠다.[4] 지릉에는 종7품의 직장 1명과 종9품의 참봉 1명을 두었다.[5]
한편 2009년 6월 27일 대한민국에 있는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나, 지릉은 그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6]
관련 사건
편집지릉에는 여러 차례의 화재 사건이 발생하였다.
- 1474년(성종 5년) 음력 10월에 지릉 재궁의 승려 홍수라는 자가 관비와 간통 사건을 일으키고 분수승[7]의 급료를 간통한 여인에게 사사로이 준 것이 발각되었다. 이에 참봉 안자의가 관청에 보고하여 홍수를 재궁에서 쫓아냈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홍수가 지릉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8] 당시 산릉에 방화를 하는 죄는 명시된 것이 없어 어떠한 죄를 적용해야 할지 논의가 있었으며,[9] 결국 홍수는 능지처참의 형을 받고 연좌는 적용하지 않았다.[10]
- 1624년(인조 2년) 음력 11월에도 불이 나 인조와 신하들이 3일간 변복을 하고 시장을 철폐하는 조치를 취했다.[11]
- 1630년(인조 8년) 음력 4월에도 불이 났다. 신하들은 재실이 떨어져있고 지키는 이가 승려 2명밖에 없음을 지적하며, 재실을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옮기고 참봉이나 수호군까지 모두 입직할 수 있도록 건의하여 인조가 윤허하였다.[12]
한편 일제강점기 때에는 도굴 미수 사건이 발생하였다.
각주
편집- 내용주
- 참조주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지릉〉항목
- ↑ 태조실록 1권, 총서 13번째기사
- ↑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8일 정사 1번째기사
- ↑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0월 28일 병자 1번째기사
- ↑ 《관직명사전》〈지릉〉항목
- ↑ 노형석 (2009년 6월 27일).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등재”. 《한겨레》. 2017년 5월 4일에 확인함.
- ↑ 분향하고 수도하는 중을 뜻한다.
- ↑ 성종실록 48권, 성종 5년 10월 17일 기해 1번째기사
- ↑ 성종실록 48권, 성종 5년 10월 28일 경술 6번째기사
- ↑ 성종실록 50권, 성종 5년 12월 2일 계미 3번째기사
- ↑ 인조실록 7권, 인조 2년 11월 14일 갑자 2번째기사
- ↑ 인조실록 22권, 인조 8년 4월 15일 갑자 1번째기사
- ↑ “安陵盜堀未遂(안릉도굴미수) 파다가못파고도주”. 《동아일보》. 1932년 7월 24일. 2017년 1월 10일에 확인함.
- ↑ “王家各陵寢(왕가각능침) 守護改善建議(수호개선건의)”. 《동아일보》. 1932년 8월 17일. 2017년 1월 12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