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進士)는 과거 단계 중의 하나이다.

고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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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진사는 한동안 과거 시험인 진사과의 급제자를 뜻하며 관리에 임용되었으나, 조선시대 진사는 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小科) 진사시 합격자를 뜻하는 의미로 격하된다.[1] 조선에서는 소과 과거시험인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의 직역이 '진사'이다.

고려의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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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술업(製述業)이 시험 과목이던 고려 시대의 시험인 진사과[2]가 고려의 문과(文科)에 해당하므로, 조선에서 소과 진사시는 진사과와 서로 다른 것으로 구별되어야 한다.[2] 고려 무신란 이후로는 제술업 급제자로서 관리에 등용되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났으며, 고려 문한관(文翰官)은 무신정권이나 원나라의 압력이 있기 전에는 무신을 제외한 문신의 기능이 있어서 제술업 급제자에 의해 독점되다시피 하는 관직이었다.[3]

조선의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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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진사와 생원(生員)과의 관계는 법제적으로는 우열이 없으나, 조선 초기에는 진사시가 없이 생원시만 있었는데 생원이 진사보다 우대를 받았고 할 수 있다.[2] 사림파가 등장한 이래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경학(經學)보다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풍조에 따라 진사의 사회적 존경도는 대체적으로 생원보다 높아졌다.[2]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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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는 수나라에서 북송 중기에 있었던 과거 제도 여섯 과의 하나이다. 왕안석의 개혁으로 진사과 이외 폐지된 후 과거의 등제자 (합격자)를 가리킨다.

진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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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대 초반에 과거가 시작되었지만, 605년에 진사과가 설치되었다. 수·당나라 시대는 진사과와 명경과에 별도의 시험을 치렀다. 명경과는 유학 지식이나 시무책뿐이었지만, 진사과에서는 여기에 시부를 더했다. 진사과는 시험이 가장 어렵고, 한번에 합격되는 수는 2 ~ 30명으로 명경과의 1/10이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시되었고 지위는 다른 과보다 높았다. "명경과는 30세까지, 진사과는 50세라도 젊은 사람'이라는 말은 진사과가 얼마나 어려웠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왕안석의 개혁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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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의 과거 제도도 시작은 진사, 명경과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왕안석의 개혁을 거쳐 등 여러과가 폐지되고, 진사과 한과만 남게 되었다. 원나라에서도 과거가 시작되었을 때도 진사과만 남았으며, 명나라, 청나라에서도 그것을 이어 받았다. 따라서 과거를 볼 수 있는 등제자를 진사라고 칭하는 말이 되었다.

명나라와 청나라는 전시에서 선발된 등제자는 삼갑으로 나뉘었다. 1갑은 장원, 방안, 탐화 3명을 "진사 급제"라고 칭하고, 2갑은 약간명(청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40-50명) "진사 출신"이라고 칭하고, 3갑(청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100-300 명)은 "동진사 출신"이라고 칭했다. 그들 모두를 진사라고 부른 것이다.

진사의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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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자가 회시에 합격하게 되면 진사가 되었다. 이들 진사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향유하며 전체 신사들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최고의 상층 신사였다. 진사 학위를 취득함으로써 직접 관계에 진출할 수 있게 되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거의 즉시 관리로 임명되었다. 회시도 일련의 몇 개의 시험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회시는 그 시험 중의 첫 번째 시험을 의미했다. 이 시험에 합격한 사라들은 공사(貢士)라고 불렸다. 그 다음의 시험인 전시는 1개월 후에 실시되었는데, 회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최종성적을 결정하는 시험이었다. 이 전시를 치른 사람들을 진사라고 불렀지만 공사로서 진사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공사는 일시적으로, 회시와 전시 사이의 짧은 기간의 호칭일 뿐이었다.

문과의 회시에서 좋은 성적으로 급제한 자들은 한림원에 보내졌고 이곳에서 각 성의 학정으로 파견되든가 혹은 중앙․지방의 고위관리로 임명되었다. 회시는 3년에 1회 (문과의 경우 축․진․미․술 등의 해 3월 9일, 12일, 15일 세 차례에 걸쳐 경사에서 실시되었다. 무과의 회시는 같은 해 9월 5일, 15일) 실시되었다. 급제자들은 성적에 따라 3등급으로 분리되었고 그들의 나이와 성적에 따라 관직이 결정되었다. 대체로 1갑으로 평가받은 자들은 한림원의 수찬이나 편찬에 임명되었고 나머지는 한림원 서길사, 각 부 혹은 내각의 당주사, 지방의 지현으로 임명되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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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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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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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張仲禮, 『中國紳士』, 上海社科,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