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공
창원공 왕지(昌原公 王祉, 1197년 ~ 1262년 음력 12월 17일)은 고려의 왕족이자 희종과 성평왕후의 아들이다. 폐태자(廢太子), 창원후(昌原侯)라고도 한다.
창원공
昌原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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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왕태자 | |
재위 | 1204년 11월 6일 ~ 1211년 12월 25일 (음력) |
전임 | 왕태자 영 (희종) |
후임 | 왕태자 진 (고종) |
이름 | |
휘 | 왕지 (王祉) |
별호 | 폐태자(廢太子), 창원후(昌原侯) |
신상정보 | |
출생일 | 1197년 |
사망일 | 1262년 12월 17일(음력) |
부친 | 희종 |
모친 | 성평왕후 임씨 |
생애
편집가계
편집1197년(명종 27년) 고려의 제21대 왕 희종(熙宗)과 부인 임씨(훗날의 성평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은 왕(王), 이름은 지(祉), 본관은 개성이며, 신종(神宗)의 장손이다. 고종(高宗)의 왕비인 안혜태후 유씨(安惠太后 柳氏) 등과는 친남매간이다.
황자 시절
편집명종(明宗)이 무신들에 의해 폐위되면서 그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은 명종의 태자 오(祦, 훗날의 강종)가 아닌 동생 평양공(平凉公, 신종)이었다. 이어 1204년(신종 7년) 신종이 사망한 후 그 아들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희종이었다. 이에 따라 희종의 장남인 왕지는 8살이 되던 1204년(희종 즉위년) 음력 11월 6일 정식으로 왕태자에 책봉되었다[1]. 이후 7년 뒤인 1211년(희종 7년) 음력 4월 10일 15세가 되면서 관례를 행하였다[2].
그러나 그 해 음력 12월 25일,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최충헌(崔忠獻)이 왕지의 부왕인 희종을 폐위시키고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희종이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모의하여 최충헌을 죽여버리려 했던 것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3]. 이후 희종은 자란도(紫鷰島)로 옮겨지는 등 갖은 수모를 당하다가 1237년(고종 24년) 57세를 일기로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죽었다. 한편 희종이 강화도로 유배될 때 왕태자였던 왕지도 인주(仁州, 지금의 인천광역시[4])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태자 왕지를 대신해 60세라는 고령으로 왕위에 오른 것은 왕지의 5촌 당숙이자 원래 명종의 태자로 책봉되었던 왕오였다. 그가 강종(康宗)이다[5].
사망
편집인주에 유배된 왕지는 이후 창원후(昌原侯)에 봉작되었다[6]. 이후 창원공(昌原公)이 되었으며, 1262년(원종 3년) 음력 12월 17일,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망지나 매장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7].
가족 관계
편집- 부왕 : 희종 (熙宗, 1181년 ~ 1237년, 재위 : 1204년 ~ 1211년) - 고려의 제21대 왕
- 모후 : 성평왕후 임씨 (成平王后 任氏, ? ~ 1247년)
- 동생 : 시령후 위 (始寧侯 禕, 생몰년 미상)
- 동생 : 경원공 조 (慶原公 祚, ? ~ 1279년)
- 동생 : 대선사 경지 (大禪師 鏡智, 생몰년 미상)
- 동생 : 충명국사 각응 (冲明國師 覺膺, 생몰년 미상)
- 남매 : 안혜태후 유씨 (安惠太后 柳氏, ? ~ 1232년) - 고종의 왕비
- 남매 : 영창공주 (永昌公主, 생몰년 미상)
- 남매 : 덕창궁주 (德昌宮主, 생몰년 미상)
- 남매 : 가순궁주 (嘉順宮主, 생몰년 미상)
- 조카 : 경창궁주 유씨 (慶昌宮主 柳氏, 생몰년 미상) - 원종의 제2비
- 남매 : 정희궁주 (貞禧宮主, 생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