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

영국의 정치인 (1874–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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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레너드 스펜서처칠 경(영어: Sir 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문화어: 윈스톤 쳐칠, 1874년 11월 30일 ~ 1965년 1월 24일)은 영국의 총리를 2번 역임한 정치가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총리가 되어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다. 1922년부터 1924년까지 총 2년을 제외하고 그는 1900년부터 1964년까지 국회의원(MP)이었다.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
영국제42대 총리
임기 1940년 5월 10일~1945년 7월 26일
전임 네빌 체임벌린(제41대)
후임 클레멘트 애틀리(제43대)
영국의 제44대 총리
임기 1951년 10월 26일~1955년 4월 7일
전임: 클레멘트 애틀리(제43대)
후임: 앤서니 이든(제45대)

신상정보
출생일 1874년 11월 30일(1874-11-30)
출생지 영국 옥스퍼드셔주 우드스톡
사망일 1965년 1월 24일(1965-01-24)(90세)
사망지 영국 런던
학력 해로우 스쿨
영국 육군사관학교
미국 미주리 종합군사학원
아르헨티나 육군군사참모대학교
정당 보수당(1900~1904)
자유당(1904~1924)
보수당(1924~1964)
배우자 클레멘타인 처칠
종교 성공회불가지론

상업장관, 내무장관, 해군장관, 공군장관, 국방장관 등 다양한 공직을 거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념적으로 경제적 자유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였다. 작가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여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다.[1][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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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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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자넷과 동생 존과 함께

윈스턴 처칠은 말버러 공작 1세 존 처칠의 후손 가운데 한 명이다. 그 가문은 유명한 정치가를 배출했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처칠이 어렸을 때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비서로 일하였다. 처칠 7대 선조인 선덜랜드 백작 3세 찰스 스펜서 전 영국 총리는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의 8대 선조이기도 하다. 즉,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와 처칠은 같은 뿌리의 친척이다.[3]

윈스턴 처칠 아버지인 랜돌프 처칠(Lord Randolph Henry Spencer-Churchill)은 재무장관을 역임할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이었고, 어머니 제니 제롬 여사는 미국 여성이었다. 그러나 비타협적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정적과 권력투쟁에 밀리고서 회한의 세월을 보내다가 일찍 사망한다. 당시 처칠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사관생도로 공부하고 있었다. 처칠은 아버지의 정치적인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적에게 타협과 유머와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사관학교 시절과 보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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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학교 시절의 처칠

라틴어 성적이 좋지 않았던 그는 해로우 학교 입학시험 때에 주어진 시간인 2시간 동안 라틴어 작문을 전혀 하지 못했고[4] 해로우 스쿨에서의 학과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다행히 독서를 좋아한 덕분에 문학역사에 소질이 있어 영문학역사 성적이 좋아서 입학을 허락받았다. 결국 친척동생들과 전쟁놀이를 하면서 뛰어놀다가 다쳐서 1년간 치료받은 일을 계기로 라틴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브라이튼 학교로 옮긴 그는 학과공부에 비로소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아들이 군인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부친의 권유로 3수 끝에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사관학교에 있을 땐 독서, 수영, 승마 등을 익히면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했으며, 중대장이 모범을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리더십과 공동체의 규칙 존중을 배웠다.[4]

졸업 후 기병 소위로 임관하여 보어 전쟁에 참전했으며 병과가 기병임에도 불구하고 어깨가 좋지 않아서 기병용 검인 세이버를 휘두르지 못했고 그래서 사비로 마우저 C96 권총을 구입해다가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포로로 잡혀서 수용소생활을 했는데, 수용소에서 겨우 탈출한 처칠은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로 변장하여 돌아다니다가 영국인의 도움으로 숨어지낼 수 있었다. 처칠은 수단인도 말란칸트에서 주민들이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항하여 일으킨 항쟁을 진압하는 일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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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장관을 맡고 있었다. 처칠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군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어 속도를 빠르게 향상시키는 등의 국방개혁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었으나, 독일이 잠수함을 개발하는 바람에 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무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영국군을 파병한 작전도 인명과 재산피해가 커서 사실상 실패한 작전이 되었다.

작전실패에 대한 문책으로 장관직을 사퇴한 처칠은 처제의 권유로 우울증을 잊기 위해서 시골에서 수채화를 그렸다. 제1차 세계대전에 중령으로 복귀하여 참전하였다. 당시 그는 유머를 활용하고 복지를 개선하여 군인들의 사기를 높였는데, 모든 장병들을 목욕을 하게 하여 만연해 있던 피부병을 치료하게 했으며 "겁먹지 말게. 전쟁은 웃으면서 하는 것이야."라고 설득하여 군인들의 정신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진정시켰다. 또한 그는 어린 시절 막역지우였던 알렉산더 플레밍을 도왔다. [5]

제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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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에 임명된 후 "V" 사인을 보이는 처칠

보수당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보수당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꿨다가, 다시 보수당에 입당하였다. 때문에 당시 보수당계 정치인들에게 처칠은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후 정계에서 퇴출되었지만 다시 정치에 복귀하였다.

처칠은 한때 나치 독일이 영국을 공습할 것을 염려해 과거 공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던 일이 있었는데 당시 정계에서 무시되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공군비행사의 실수로 떨어뜨린 폭탄이 진짜 영국을 공격한 것처럼 되었지만, 사람들은 처칠의 견해가 맞다는 것이 입증이 되었다고 판단하였고 그 결과영국 정부는 처칠을 다시 해군장관에 임명하였다. 이후 네빌 체임벌린이 외교문제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1940년 5월 조지 6세의 승인으로 처칠이 총리에 임명됐다.[6] 이 후 처칠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막아내고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처칠 시대에 지은 벙커는 현재도 영국 지하에 있다.


종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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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와 함께 대서양 헌장에서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처칠

1945년 1월 1일에서 1945년 7월 26일까지 강인한 리더십으로 6개월 동안 영국 군주 조지 6세대리청정을 전담 수행하기도 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던 처칠 총리는 1943년 11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카이로 선언,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선언 등, 전후 유럽 문제를 놓고 연합국이 몇 차례 회담을 열었는데, 이것은 2차 대전을 일으켰던 나치스의 장본인 아돌프 히틀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기 위한 그의 전략이었다. 여기서 부분적으로 소련이 동유럽 국가를 병합하여 지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처칠은 소련 지도자 스탈린이 혐오스러운 체제를 이끄는 "악마"같은 폭군이라고 보았다.[7] 1943년 11월 22일 카이로에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중국의 장제스와 함께 3국 수뇌 회담을 가졌다.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마자 루스벨트와 처칠은 테헤란으로 장소를 옮겨 소련의 스탈린을 만났다. 테헤란 회담에서 처칠은 영국은 폴란드가 독립 국가로서 복원되는데 지대한 관심이 있다고 말하였다.[8] 영국은 이 문제가 연합국간에 마찰의 소지가 될 것을 우려하여 폴란드 문제를 꺼내길 우려하였다.[8]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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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의 무덤

1945년 7월에 실시한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하며 총리에서 물러났다.[9] 노동당이 393개의 의석과 총유효투표의 48%를 획득하며 승리하였고 처칠이 이끈 보수당은 213석으로 줄어들었다.[10] 이는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크게 패배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946년 3월 5일, 미국 남부 미주리주의 작은 도시 풀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행한 연설에서 처칠은 유럽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다고 주장했다. 처칠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영어 사용 국민들 간의 형제애적 단결'을 호소하였다. 1951년 보수당이 다시 정권을 잡자 총리에 재임명되었다.

1953년 여러권의 책을 저술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1] 1955년앤서니 이든에게 물려주고, 하원 평의원으로 머무르다가 1964년에 의원직에서 물러나 정식으로 정계에서 은퇴했다.[11] 1964년 미국 의회는 처칠에게 미국 명예시민권을 수여하였다.

1965년 1월 24일, 향년 91세로 고인이 되었으며, 영국의 모든 관공서 뿐만 아니라 학교, 해외주재 대사관, 영사관들도 모두 조기를 게양하였다. 영국 국민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나라 사람들이 그에 대한 애도를 표했으며,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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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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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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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네이버 지식백과] 윈스턴 처칠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 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 (인물세계사, 표정훈)......처칠은 신문에 기고한 많은 에세이와 시사평론은 물론 소설, 전기, 회고록, 역사서 등을 집필한 정력적인 작가, 저술가였다. 대표작은 6권 분량의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과 카이사르의 영국 침공 시기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를 아우르는 <영어 사용민의 역사>다. 그는 ‘전기와 역사서에서 보여 준 탁월함과, 고양된 인간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행한 훌륭한 연설’을 이유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2. 김정환 <20세기를 만든 사람들> 푸른숲 1995년 p50
  3. Tree: Charles SPENCER, Prime Minister of the United Kingdom
  4. 신상웅; 김희준. 《어린이 그림위인전기 처칠》. 
  5. “계몽사 어린이그림위인전기《처칠》/신상웅 씀,김희준 그림/계몽사”. 2018년 8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8월 2일에 확인함. 
  6. 박지향 <영국사, 보수와 개혁의 드라마> 까치글방 2000.7.5, p470
  7. Miscamble, Wilson D. (2007). 《From Roosevelt to Truman: Potsdam, Hiroshima, and the Co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0-521-86244-2. 
  8. Wettig, Gerhard (2008). 《Stalin and the Cold War in Europe》. Rowman & Littlefield. ISBN 0-7425-5542-9. ,
  9. 기무라 <전후세계사> 역사교양사 1999년 p74
  10. 이주영 外 3명 <서양현대사> 삼지원 1995년 p74
  11. [네이버 지식백과] 윈스턴 처칠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 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 (인물세계사, 표정훈)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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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네빌 체임벌린
영국의 총리
1940년 - 1945년
후임
클레멘트 애틀리
전임
클레멘트 애틀리
제48대 영국 야당 당수
1945년 7월 26일 ~ 1951년 10월 26일
후임
클레멘트 애틀리
전임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의 총리
1951년 - 1955년
후임
앤서니 이든
전임
이오시프 스탈린
제14대 타임 올해의 인물
 
1940년
후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전임
해리 S. 트루먼
제23대 타임 올해의 인물
 
1949년
후임
미국의 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