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티야 왕조

카카티야(텔루구어: కాకతీయులు)는 12세기에서 14세기 사이에 오늘날의 인도의 동부 데칸 지역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중세 인도의 텔루구계 왕조이다.[1] 그들의 영토는 오늘날의 텔랑가나주, 안드라프라데시주의 대부분과 카르나타카주 동부, 타밀나두주 북부, 오디샤주 남부의 일부로 구성되었다.[2][3] 그들의 수도는 오늘날 와랑갈로 알려진 오루갈루였다.

카카티야
కాకతీయులు

800년~1323년
수도오루갈루
정치
정치체제군주제
마하라자
800년 ~ 815년
1261년 ~ 1289년
1289년 ~ 1323년

니리파 베나
루드라마 데비
프라타파루드라 2세
역사
 • 건국800년
 • 서찰루키아로부터 독립1163년
 • 멸망1343년
지리
위치텔랑가나
인문
공통어텔루구어, 산스크리트어
공통문자텔루구 문자
민족텔루구인
종교
국교힌두교
기타
현재 국가인도의 기 인도

초기 카카티야 통치자들은 2세기 이상 라슈트라쿠타서찰루키아의 봉신 역할을 했다. 그들은 서기 1163년 텔랑가나 지역의 다른 찰루키아 부하들을 억압함으로써 프라타파루드라 1세의 통치하에 놓였다.[4] 가나파티 데바(재위 1199–1262)는 1230년대 동안 카카티야 땅을 크게 확장시켰고 고다바리강과 크리슈나강 주변의 텔루구어를 사용하는 저지대 삼각주 지역을 카카티야의 지배 하에 놓았다. 가나파티 데바의 뒤를 이어 루드라마 데비(재위 1262–1289)가 즉위했는데, 그녀는 인도 역사상 몇 안 되는 여왕들 중 한 명이었다. 1289–1293년쯤 인도를 방문했던 마르코 폴로는 루드라마 데비의 통치와 본성을 아첨하는 말로 언급했다. 그녀는 야다바 왕조의 공격으로부터 카카티야 영토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4]

1303년, 델리 술탄국의 술탄 알라웃딘 할지는 카카티야 영토를 침략했고 왕조는 이를 방어해내는데 성공했지만,[a] 1310년 와랑갈 포위 성공 이후, 프라타파루드라 2세는 델리에 매년 조공해야만 했다. 1323년 울루그 칸 (즉, 투글루크)의 또 다른 공격은 카카티야 군대에 의해 강력한 저항을 받았지만, 그들은 결국 패배했다. 카카티야 왕조의 종말은 무수리 나야크들이 다양한 텔루구 부족들을 통합하고 와랑갈을 델리 술탄국으로부터 되찾기 전까지 외국 통치자들 아래 한동안 혼란과 무정부 상태를 초래했다.[5]

카카티야 왕조는 텔루구 땅의 독특한 고지대와 저지대 문화를 통합했고, 이것은 텔루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문화적 친밀감을 느끼게 했다. 카카티야 시대에는 또한 "탱크"라고 불리는 고지대에 관개를 위한 저수지의 건설도 보였는데, 이것들 중 많은 것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평등주의적이었고 출생에 관계없이 누구나 전사의 지위를 나타내는 나야카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농부들을 군대에 모집하여 새로운 전사 계급을 초래하고 사회적 이동을 제공했다. 카카티야 시대에는 또한 기존 방식을 개선하고 혁신한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의 발전을 목격했다.[6] 가장 주목할 만한 예로는 하남콘다의 천 개의 기둥 사원, 팔람펫의 라마파 사원, 와랑갈 요새, 골콘다 요새, 간푸르의 코타 굴루가 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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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경 텔루구계 부족의 족장인 니리파 베나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초기에는 서부 데칸의 서찰루키아의 속국으로 존재하였다. 12세기 중반에 점차 서찰루키아가 쇠퇴하자 당시 통치자였던 프롤라 2세는 이를 틈타 세력을 확장하였고 그의 후계자인 프라타파루드라 1세때 서찰루키아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후 고다바리 삼각주까지 왕국을 북쪽으로 확장시켰다. 다음 통치자였던 마하데바는 해안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그 후 13세기 가나파티 왕때 카카티야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당시 카카티야의 인접국들인 세부나, 호이살라, 판디아, 촐라 등과 격돌하며 칸치푸람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텔루구 지역의 통합에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가나파티 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그의 딸 루드라마가 왕위를 물려받았으며 그녀는 1270년에 동강가 왕국과 동맹을 맺어 세부나를 공격해 동부 데칸을 차지하였다. 1289년 루드라마가 죽고 프라타파루드라 1세가 왕위를 물려받은 이후 카카티야는 쇠락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1323년 델리 술탄국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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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티야는 당시 타 국가에 비해 카스트 제도가 그리 엄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카카티야의 역대 왕들이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수드라 출신인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자티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로 나타나왔으나 카카티야 비문은 사람들이 자티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정권과 군대의 연계는 카카티야의 중요한 특징이었는데, 유목민 계통의 농민들을 군대에 모집하여 전사 계급을 창출하고 사회적으로 이동시키며 왕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카카티야에서는 관개를 위하여 고지대에 약 5000개의 저수지가 건설되었으며, 이로써 건조 기후 지역의 개발 가능성을 높였다.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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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티야의 왕들은 예술과 문학 발전에 큰 후원을 했는데, 산스크리트어를 장려함으로써 산스크리트 문학을 부흥시키기도 했으며, 하남콘다에 위치한 1000개의 기둥을 가진 사원(Thousand pillared temple)과 같이 인도 북부와 남부 양식을 혼합한 카카티야 양식의 만디르들을 건립하기도 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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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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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arma (1957, 234쪽): "다마의 아들인 베나마는 1303년 알라웃딘 할지가 텔랑가나를 처음 침공했을 때 그의 군대를 이끌고 튀르크 군대를 물리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튀르크 군대를 상대로 한 이 전투는 우파라팔리 전투에서 이루어졌는데, 포투간티 마일리가 적들을 도망치게 했다고 전해진다."

참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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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r. Mamidi, Harikrishna (2023년 10월 19일). “Rise and fall of Kakatiyas, turning point in Indian history”. 《Telangana Today》 (미국 영어). 2023년 10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3년 10월 30일에 확인함. 
  2. Ventakaramanayya 1942, 1–2쪽.
  3. For a map of their territory see: Schwartzberg, Joseph E. (1978). 《A Historical atlas of South Asia》.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47, map XIV.3 (b)쪽. ISBN 0226742210. 
  4. T. V., Mahalingam (1957). 《Seuna-Kakatiya》. 150쪽. 
  5. Talbot 2001, 178쪽; Eaton 2005, 26–27쪽; Chattopadhyaya 1998, 57–59쪽
  6. Singh, B. Satyanarayana (1999). 《The Art and Architecture of the Kākatīyas》 (영어). Bharatiya Kala Prakashan. 33, 65쪽. ISBN 978-81-86050-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