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무게
테무게 옷치긴(Temüge Odčigin, 몽골어 표기: Тэмүгэ отчигин, 1168년 - 1246년)은 몽골 제국의 황족으로 초대 대칸 칭기즈 칸의 막내동생이다. 예수게이 바토르의 넷째 아들로 칭기즈칸과 동모(同母) 형제이며, 다른 동모형으로 주치 카사르, 카치운이 있다. 이복 형제로는 벡테르와 벨구테이가 있다. 1241년 오고타이 사후, 쿠릴타이 없이 대칸이 되려고 정변을 시도했으나 퇴레게네 카툰의 반대와 서방 원정 중이던 귀위크의 연이은 도착으로 실패했다.
그에게는 몽골 동부, 만주와 인접한 지역이 영토로 분봉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요양과 요동 등지에서 제후로 활동했다. 테무게의 후손들은 원나라가 망한 뒤에도 명나라에 귀순, 15세기 후반까지 요양 지역의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름
편집『원조비사』(元朝秘史)나 『원사』(元史), 《고려사》 등 한자 사료에는 첩목격 알척적근(帖木格斡惕赤斤)[1]、철목가 알적근 국왕(鉄木哥斡赤斤国王), 첩목격 알적근(帖木格斡赤斤), 특목가 와진(忒木哥窩眞), 알진 나안(斡陳那顔), 와적흔(訛赤忻) 등으로 되어 있다. 다른 문헌에는 철목가 알적근(鐵木哥斡赤斤), 오제금(乌济锦) 등으로도 표기된다.
라시드웃딘의 『집사』(集史) 등 페르시아어 표기는 تموكه اوتچكين Tamūka Ūtchikīn 로 기록되어 있다. 『집사』에 나오는 웃치(긴) 뉴얀( اوتچی نويان Ūtchī Nūyā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하며, 주바이니의 『세계정복자의 역사』(تاريج جهانگشاء Ta'rīkh-i Jahān-gushā'/Ta'rīkh-i Jahān-gushā'ī)에도 웃킨 뉴얀( اوتكين نويان Ūtkīn Nūyān)으로 기록되어 있다.
옷치긴이란 「아궁이의 불씨를 지키는 자」라는 의미[2]로 테무게가 그의 어머니 호엘룬의 가산을 상속받은 막내아들이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생애
편집생애 초반
편집테무게는 예수게이와 호엘룬의 넷째 아들이다. 동복 형 테무진(후일의 칭기즈 칸)과 주치 카사르, 카치운과 이복 형 벡테르, 벨구테이가 있었다. 테무게는 1168년생 혹은 1166년생으로 자세한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원조비사』에 따르면 칭기즈 칸과는 여섯 살 차이가 났다고 한다.
나이만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1217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서방 원정에서 어머니 호엘룬을 모시며 몽골 본토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원조비사》). 이는 그의 세력을 더욱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대칸을 대신해 몽골과 요동, 고려 관련 업무를 맡게 된 테무게 옷치긴은 자신의 권세를 이용해 흥안령 동쪽으로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다. 칭기즈 칸은 다른 동생 카사르, 카치운의 일족보다 그를 대우하였다. 그에게는 요동 주변과 만주 서부 지역이 울루스로 배정되었다.
군사 활동
편집1220년 요동 지역에서 몽골에 복속되어 있던 거란인 야율유가(耶律留哥)가 죽고 그의 처 요리씨(姚里氏)가 몽골에 와서 이를 아뢰었을 때 테무게 옷치긴은 스스로 황태제(皇太弟)의 신분으로 법도에 따라 요리씨에게 호부(虎符)를 달고 남편의 속민을 7년 동안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였으며[3] 그보다 1년 전인 1219년 마찬가지로 황태제 국왕의 자격으로 그리고 원수 카신(合臣), 부원수 차라(劄剌) 및 선차대사(宣差大使) 경도홀사(慶都忽思)와 동진국(東眞國)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 흘석렬(紇石烈) 등 10인을 통해 고려에 조공을 촉구하기도 하였다.[4]
1227년의 제5차 서하(西夏) 공격에서 형 칭기즈 칸이 이끄는 본대와는 다른 별동 부대를 이끌고 서하의 신도부(信都府)를 쳤다. 이 해에 칭기즈 칸이 죽자 오고타이와 툴루이를 놓고 누구를 차기 대칸으로 앉힐 지 논란이 발생했다. 1229년에 열린 40일간의 쿠릴타이에서 테무게는 조카 차가타이와 함께 우구데이를 새로운 몽골의 대칸으로 추대하였다.
1230년부터 전개된 제2차 금나라 공격에서는 좌익군(左翼軍)을 이끌고 금나라의 수도 중도(中都)에서 황하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그는 황하를 건너와서도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5] 공포에 질린 금나라 백성들이 개봉(開封)과 그 주변으로 도망쳐 오면서 급작스러운 인구 유입으로 금나라에 식량 위기와 사회불안을 가져왔다.[6][7] 테무게 옷치긴 왕가는 1233년 금나라 유민들이 지린성 일대에 세운 동진국(東眞國)을 병합, 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금나라 멸망 뒤인 1236년 우구데이 칸이 시행한 분봉에서 익도로(益都路, 산둥성 칭저우 시), 평주(平州, 허베이성 루룽 현), 난주(灤州, 허베이 성 롼저우시)를 분여받았다.[8]
정변기도 실패와 최후
편집1241년 말에 우구데이 칸이 죽자 테무게는 대칸의 유궁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이끌고 우구데이의 황후들이 거처하는 오르두(행궁)로 향했다. 그러나 우구데이의 황후 퇴레게네 카툰은 "우리는 당신의 의붓딸이며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무장한 많은 군대를 이끌고 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왜 모든 백성과 군대를 불안하게 만드는가?"[9]라 항의하며 거절하고, 앞서 서방 원정을 나갔던 우구데이의 아들 구유크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듣고 대칸의 자리를 포기, 퇴레게네 카툰에게 우구데이에 대한 조의를 전하고 철군하였다. 이러한 옷치긴의 거병은 앞서 우구데이가 옷치긴에 대해 시행했던 중앙집권정책에 수반한 강한 견제책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0] 그 뒤 테무게는 몽골 왕후(王侯)들을 인솔하고 새로운 대칸을 추대하는 쿠릴타이나 구유크의 대칸 즉위식에도 참석하였는데, 우구데이에 이어 차가다이까지 갑자기 사망한 것에 테무게 옷치긴의 배후 관여를 의심하는 의견도 존재하고 있다.[11]
1246년 테무게는 다시 쿠릴타이 없이 대칸 자리를 탈취하려 시도했다. 구유크가 대칸으로 즉위한 뒤, 앞서 그를 제치고 대칸의 지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것에 대해 툴루이 가문의 몽케와 주치 가문의 오르다(주치의 큰아들)에게 심문을 받았고, 그의 휘하 장교들을 전원 처형하는 것으로 재판을 매듭지었다. 귀위크는 테무게에게 부여된 옷치킨(화로의 수호자라는 지위)를 바투 칸의 형 오르다와, 몽케에게 나누어서 수여하려 시도하였다. 이 판결 직후에 테무게 옷치긴 자신도 사망하였다.
인물
편집형 칭기즈 칸에게 특별히 사랑받았으며, 라시드웃딘의 《집사》에는 칭기즈 칸이 테무게 옷치긴을 다를 형제들보다 특히 더 아껴서 그의 다른 두 친형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혔으며, 라시드웃딘이 살던 당시까지도 테무게 옷치긴의 자식들은 주치 카사르나 카치운의 자식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칭기즈 칸이 즉위한 뒤에는 다섯 천인대(밍간)을 받았고 나아가 어머니 호엘룬이 준 세 천인대를 이어받아 모두 여덟 천인대를 소유하기에 이르렀다.[12] 이는 다른 몽골 왕후들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것이었고, 몽골의 전통적인 말자상속관행과도 관련이 있다.[13] 몽골 동방의 좌익부인 만주에 접한 지역에 유목지를 받아 다른 동모형제 주치 카사르, 카치운의 자손 등 동방의 왕후들을 통솔해 몽골 귀족이나 한인(漢人) 세력에 영향력을 가지고 몽골 제국 좌익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칭기즈 칸 사후 조카 우구데이의 옹립에 협력하였으며 몽골 제국의 동방을 대표하는 인물로써 우구데이 칸, 서방 지역을 통할했던 조카 차가다이와 함께 몽골 제국의 신체제를 구축하였다.
테무게 옷치긴은 용기 있는 성격으로 오르두를 다스리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또한 매우 화려한 것을 좋아해서 자신의 영지 안에 궁전이나 원림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사후
편집아들 타리추(脱里出)가 수왕(寿王)에 봉해졌다가 수왕 직위는 다른 아들 지부겐의 아들 혹은 손자인 나이만타이에게 이어졌다. 다른 증손 토크토아는 요왕에 봉해졌다. 토크토아의 후손들은 원나라 멸망 후에도 주원장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연명해나갔다. 토크토아의 후손들은 1470년대까지도 요왕으로 요동 주변 지역을 다스렸다.
귀위크는 테무게에게 부여된 옷치킨(화로의 수호자라는 지위)를 바투 칸의 형 오르다와, 툴루이 가문의 몽케에게 나누어서 수여하려 했다. 그러나 몽골 귀족들이 전통을 이유로 반대하여 실패했다.
가족
편집테무게 옷치긴의 맏아들 지브겐의 아들 타가차르는 쿠빌라이 칸에게 중용되어 원(元) 왕조 설립에도 공헌하였다. 테무게 옷치긴의 자손은 칭기즈 칸의 다른 동모동생 주치 카사르나 카치운의 집안과 함께 동방3왕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타가차르의 손자 나얀이 카이두의 난에 연좌되어 쿠빌라이의 친정으로 처형되었다.
- 테무게 옷치긴(Temüge Odčigin,鉄木哥斡赤斤/تموگه اوتچگين Temūga Ūtchigīn)
- 지브겐 대왕(J̌ibügen, 只不干大王/جیبوJībū)
- 타가차르 국왕(Taγačar, 塔察児国王/طغاچار نویانTaghāchār Nūyān)
- 아주르 대왕(Aǰul,阿朮魯大王/اجولAjūl)
- 나얀 대왕(Nayan,乃顔大王/نایانNāyān)
- 요왕(遼王) 토크토(Toqto'a,遼王脱脱/توقتا کوونTūqtā Kūwn)
- 요왕 야나슈리(Yanaširi,遼王牙納失里)
- 요왕 아자시리(Aǰaširi,遼王阿札失里)
- 요왕 야나슈리(Yanaširi,遼王牙納失里)
- 요왕(遼王) 토크토(Toqto'a,遼王脱脱/توقتا کوونTūqtā Kūwn)
- 나얀 대왕(Nayan,乃顔大王/نایانNāyān)
- 수왕(寿王) 나이만타이(Naimantai, 寿王乃蛮台/نایمتایNāīmatāī)
- 아주르 대왕(Aǰul,阿朮魯大王/اجولAjūl)
- 타가차르 국왕(Taγačar, 塔察児国王/طغاچار نویانTaghāchār Nūyān)
- 지브겐 대왕(J̌ibügen, 只不干大王/جیبوJībū)
호엘룬 | 예수게이 바토르 | ||||||||||||||||||||||||||||||||||||||||||||||||||||||
보르테 | 테무친 (칭기즈 칸) | 카사르 | 카치운 | 테무게 | 벨구테이 | 벡테르 | |||||||||||||||||||||||||||||||||||||||||||||||||
주치 | 차가타이 | 우구데이 | 툴루이 | ||||||||||||||||||||||||||||||||||||||||||||||||||||
초기 옷치긴 울루스의 다섯 천인대장(밍간)
편집- 메르키트부의 쿠츄(Küčü >曲出,qūchū)
- 베스트부의 코코츄(Kököčü >闊闊出,kuòkuòchū)
- 자지라트부의 주스쿠(J̌usuγ >種索,zhŏngsuŏ)
- 출신 부족이 확실하지 않은 코르코순(Qorqosun >豁児豁孫,huōérhuōsūn)
- 오로나울 부의 천인대장(이름 불명)
각주
편집- ↑ 『원조비사』 권1・60단
- ↑ 『집사』 예수게이 바토르기(紀)의 제자표(諸子表) 테무게 옷치긴 조(條)에 따르면 「테무게가 이름이다. 옷치긴이란 '불과 유르트(몽골 고유의 이동식 천막 또는 목초지)의 주인'이라는 의미로 나이 어린 자식은 옷치긴이라 불렸다( تموكه نام است و اوتچكين يعنى خداوند آتش و يورت و پسر كوچكين را اوتچكين گويند Tamūka nām ast wa Ūtchikīn ya`nī khudāvand-i ātash wa yūrt wa pisar-i kūchakīn rā Ūtchikīn gūyand )」고 소개되어 있다.
- ↑ 중화서국 교점교감본 《원사》(元史) 권149 야율유가전, 3514쪽.
- ↑ 《원고려기사》 태조 14년(1219년) 9월 11일.
- ↑ 스기야마 마사아키 저 『몽골 제국의 흥망(상) 군사확대의 시대』(モンゴル帝国の興亡(上)軍事拡大の時代), 고단샤(講談社), 1996년 5월, 62-63쪽
- ↑ 호리카와 테츠(堀川徹)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モンゴル帝国とティムール帝国) 『중앙유라시아사』(中央ユーラシア史), 小松久男 편, 新版世界各国史, 山川出版社, 2000년 10월, 183쪽.
- ↑ 스기야마 마사아키(衫山正明) 저 『몽골 제국의 흥망(상) 군사확대의 시대』(モンゴル帝国の興亡(上)軍事拡大の時代), 60쪽
- ↑ 《원사》 권2 태종본기, 35쪽
- ↑ Rashid al-Din, J. A. Boyle tr., The Sucessors of Genghis Khan,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1, 178쪽.
- ↑ 김호동 「구육과 그의 시대」 『근세 동아시아의 국가와 사회』 일조각, 1998, 123~124
- ↑ 杉山正明『モンゴル帝国と長いその後』(興亡の世界史, 講談社, 2008年2月)178頁
- ↑ 《몽골비사》는 칭기즈칸의 어머니 호엘룬과 옷치긴에게 만 명을 주었다(유원수 역주 《몽골비사》 사계절, 2004, 242절)고 했고, 《집사》에는 호엘룬에게 3천 명, 옷치긴에게 5천 명을 주었다고 전하고 있다(라시드웃딘 지음, 김호동 역주 《칭기즈칸기》사계절, 2003, 452~462쪽). 이러한 불일치는 몽골 제국 성립 직후의 사실을 전하는 《몽골비사》와 칭기즈 칸 사망 이후 일족이 보유한 군대의 수를 말하는 《집사》의 시간적인 차이에서 기인한다(고명수 「몽골 제국 시기 옷치긴 왕가의 세력 기반과 그 변화」 『사총』58,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04년, 123쪽).
- ↑ 고명수, 같은 논문, 『사총』58,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04년, 1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