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혁명당 사건
통일혁명당 사건은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지하당 조직 사건이다. 158명이 검거되어 50명의 구속자를 낸 1960년대 최대의 공안 사건으로 김종태를 비롯한 주범들은 사형을 언도받았다.[1]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김종태가 전후 4차례에 걸쳐 북괴 김일성과 면담하고 '통일혁명당'을 결성하여 혁신정당으로 위장, 합법화하여 반정부·반미 데모를 전개하는 등 대정부 공격과 반정부적 소요를 유발시키려는 데 주력했다."라고 발표했다.[1]
개요
편집통일혁명당은 김종태가 월북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령·자금을 받고 결성된 혁명 조직이었다. 통혁당은 중앙당인 조선로동당의 지시를 받는 지하당이었다. 주범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당원 이진영·오병헌은 1968년 4월 22일 월북해 교육을 받던 중 1968년 8월 말 통혁당 사건이 터지자 북한에 머물렀다.
이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2]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온 이후 육군사관학교에서 교관을 하다가, 구속되었던 신영복은 1심과 2심에서 사형,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3] 중앙정보부는 암호를 해독하여, 이문규를 구출하러 북이 파견한 공작선을 격침시키면서 2명을 생포하였고,[4] 결국 이들도 통혁당 관련자로 사형을 언도받게 되었다. 박성준은 자신의 처 한명숙을 포섭하는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유낙진은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나 이후 20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되어 검거된 자는 모두 158명이었으며, 이들 중 73명이 송치되었고, 23명은 불구속되었다. 무장공작선 1척, 고무보트 1척, 무전기 7대, 기관단총 12정, 수류탄 7개, 무반동총 1정과 권총 7정 및 실탄 140발, 12.7mm 고사총 1정, 중기관총 1정, 레이다 1대와 라디오 수신기 6대, 미화 3만여 달러와 한화 73만여 원 등이 압수되었다.[5]
김종태가 사형을 당하자 김일성은 그에게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해주사범학교를 김종태사범학교로 개칭하였다. 신영복은 사상 전향을 하여 1988년 출소하였다.
각주
편집- ↑ 가 나 서대웅. 신영복 교수 영결식 엄수… '감옥'에서 깨달은 '관계·조화'의 삶. 머니위크. 2016년 1월 18일.
- ↑ 한홍구, 신영복의 60년을 사색한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겨레21
- ↑ 신영복 인터뷰, 통일혁명당사건으로 20년 만에 가석방된 신영복씨, 사회와 사상(한길사) 1989년 11월 통권 제15호
- ↑ 共匪12명射殺·2명生捕, 《동아일보》, 1968.8.21
- ↑ 박종선, 국정분야별검색 > 공공질서 > 공안사건 지휘, 감독 > 국가보안법 제개정 > 국가보안법위반사건 > 통일혁명당사건 Archived 2011년 6월 29일 - 웨이백 머신, 국가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