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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는 [[한국]]의 고대 왕조국가 중 하나이다.<ref>[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5/04/12/1995041271801.html 고구려 1/건국(역사 남과 북 7)]</ref> 국성은 고씨(高氏)이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0126350 <nowiki>[학술] "이것이 광개토대왕 얼굴"</nowiki>]</ref> 본래의 국호는 고구려였으나 당시의 금석문과 역사 기록을 토대로 [[장수왕]]대에 '''고려'''(高麗)로 개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3425 고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3885 충주 고구려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20102&tabId=01&levelId=hm_009_0060 충주 고구려비와 중원 지역 -우리역사넷]</ref><ref>永樂七年歲在丁酉(영락7년세재정유)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605861 충주 고구려비의 판독문 재검토 -題額과 干支를 중심으로-]</ref> [[고려 태조|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
 
건국자는 [[주몽]](朱蒙)이며, [[압록강]] 중류 일대에서 세력을 키운 선주 집단과 이주 집단이 결합하면서 형성되다. 초기에는 연맹체적 성격이 강했으나, [[태조왕]]대에 나부(那部) 통치 체제를 정비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경기도 [[구리시|구리]]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역을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영유했던 한국 [[고대사|고대]]의 국가이다.<ref>{{웹 인용|url=https://guri.grandculture.net/guri/toc/GC06121004|웹사이트=향토문화전자대전|시리즈=디지털구리문화대전|제목=고구려|확인날짜=2024-12-08|출판사=한국학중앙연구원}}</ref>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하였고, 중국의 [[한사군]]을 축출하며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는 북방의 [[만주]]와 남방의 [[한반도]] 중부 한강 유역을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영유하여<ref>{{웹 인용|url=https://guri.grandculture.net/guri/toc/GC06121004|제목=고구려|웹사이트=향토문화전자대전|시리즈=디지털구리문화대전|출판사=한국학중앙연구원|확인날짜=2024-12-08}}</ref> 이 때가 전성기로 평가된다​. 또한,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을 방어하였는데 그중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은 대표적인 승리로 여겨진다.
 
정치적으로는 왕을 중심으로 한 귀족연합정치가 이루어졌으며, 체계적인 관등과 관직 제도를 운영하였다​. [[불교]]를 국가 종교로 채택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고, 유교적 정치 이념을 도입하여 중앙집권적 질서를 확립했다.
 
668년, 고구려는 내부의 귀족 간 갈등과 외부의 [[나당동맹]]에 의해 멸망했으나, 고구려의 문화와 정신은 [[발해]]와 [[고려]]로 이어졌다.
 
== 국가의 성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