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구
서유구(徐有榘, 1764년~1845년)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농정가(農政家), 저술가이다. 본관은 대구, 자는 준평(準平), 호는 풍석(楓石),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서명응(徐命膺)의 손자이자, 이조판서를 지낸 서호수의 친아들이지만 숙부 서철수(徐澈修)에게 입양되었다. 친외조부는 대사헌(大司憲)이였던 충정공(忠正公) 이이장(李彜章) 이고 양외조부는 김덕균(金德均)이다.
생애
편집1790년(정조 14)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1792년 대교(待敎)·검열을 지냈으며, 1797년 왕명에 따라 《향례합편(鄕禮合編)》을 편집했다. 1806년 관직에서 물러나 18년간 힘들게 농촌살이를 하다가 순조 때 관직에 복귀하였다. 의주 부윤·대사성·강화부 유수·형조·예조 판서·대사헌을 거쳐 1838년(헌종 4) 다시 대사헌, 이어 상호군·이조·병조 판서·우참찬·좌참찬·대제학 등 중앙 요직을 역임했다.
실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백가서(百家書)에 통달하여 문명이 높았다. 1834년 호남 순찰사로 노령 남북을 돌아보던 중 기근을 겪고 있는 백성들의 궁핍을 목격하고 나서, 일본에 가는 통신사 편에 부탁하여 고구마 종자를 구입하여 각 고을에 나누어 주어 재배를 장려하고, 《종저보》 혹은 《경계책》 등 농정에 대한 경론 및 상소문을 써서 영농법(營農法)의 개혁을 누차 역설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후 서유구는 숙부인 서형수가 동기 김달순의 역모 사건에 연루돼 정계에서 축출당하자 1806년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땅으로 돌아갔다.[1] 초야에 묻혀 지낸 18년 동안 몸소 농사를 지으며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토대로 《임원경제십육지》를 저술했다. 조선과 중국의 각종 문헌 892권을 참조하여 30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 오직 아들 서우보(徐宇輔)의 도움을 받아가며[2] 편찬 작업을 벌였다. 서유구는 환갑이 되어 다시 관직에 복귀해 전라 관찰사와 중앙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벼슬 길에서 물러난 후 그동안 모으고 다듬고 덧붙인 방대한 분량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완성했으나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출판까지 하지는 못했다. 그는 경기도 남양주 두릉에서 82세의 일기로 시봉하던 시사가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임원경제지
편집이 책은 양반의 농촌생활과 농업을 주 내용으로 한 113권에 달하는 2만8천 항목 252만자 분량의 방대한 백과사전이다. 아래와 같은 16부문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종 그림 설명과 도보(圖譜), 전국의 시장 날짜까지 수록하고 있다.
- 본리지 (本利志) 권1~13 (13권): 농사 일반에 관한 사항을 다루면서 전제(田制), 수리(水利), 토양지질, 농업지리와 농업기상, 농지개간과 경작법, 비료와 종자의 선택, 종자의 저장과 파종, 각종 곡물의 재배와 그 명칭의 고증, 곡물에 대한 재해와 그 예방, 농가월령(農家月令), 농기도보(農器圖譜), 관개도보(灌漑圖譜) 등에 걸쳐 서술했다.
- 관휴지 (灌畦志) 권14~17 (4권): 식용식물과 약용식물을 다루면서 각종 산나물과 해초·소채·약초 등에 대한 명칭의 고증, 파종시기와 종류 및 재배법 등을 설명하였다.
- 예원지 (藝畹志) 권18~22 (5권): 화훼류의 일반적 재배법과 50여 종의 화훼 명칭의 고증, 토양, 재배시기, 재배법 등에 대하여 풀이하였다.
- 만학지 (晩學志) 권23~27 (5권): 31종의 과일류, 15종의 과류(瓜類), 25종의 목류(木類), 그 밖의 초목 잡류에 이르기까지 그 품종과 재배법 및 벌목수장법 등을 설명하였다.
- 전공지 (展功志) 권28~32 (5권): 뽕나무 재배를 비롯한 비단과 무명 옷감과 직조 및 염색 등 피복재료학에 관한 논저이다.
- 위선지 (魏鮮志) 권33~36 (4권): 여러 가지 자연현상을 보고 기상을 예측하는 이른바 점후적(占候的) 농업기상과 그와 관련된 점성적인 천문관측을 논하였다.
- 전어지 (佃漁志) 권37~40 (4권): 가축과 야생동물 및 어류를 다룬 논저로서, 가축의 사육과 질병치료, 여러 가지 사냥법, 그리고 고기를 잡는 여러 가지 방법과 어구(漁具)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 정조지 (鼎俎志) 권41~47 (7권): 식감촬요(食鑑撮要)는 각종 식품에 대한 주목할 만한 의약학적 논저와, 영양식으로 각종 음식과 조미료 및 술 등을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였다.[3]
- 섬용지 (贍用志) 권48~51 (4권): 가옥의 영조(營造)와 건축기술, 도량형기구와 각종 공작기구를 농기(農器)의 도보(圖譜)와 함께 소개하였다. 농촌의 기재·복식·실내장식·생활기구와 교통수단 등에 관해서 중국식과 조선식을 비교해가며 우리 나라 가정의 생활과학 일반을 다루었다.
- 보양지 (葆養志) 권52~59 (8권): 도가적(道家的) 양생론을 편 논저로, 불로장생의 신선술(神仙術)과 상통하는 식이요법과 정신수도를 논하고, 아울러 육아법과 계절에 따른 섭생법을 양생월령표(養生月令表)로 해설하였다.
- 인제지 (仁濟志) 권60~87 (28권): 의(醫)·약(藥) 관계를 주로 다루었으나 끝부분에는 구황(救荒) 관계 및 260종의 구황식품을 소개하였다.
- 향례지 (鄕禮志) 권88~90 (5권): 지방에서 행해지는 관혼상제 및 일반 의식(儀式) 등에 관한 풀이이다.
- 유예지 (游藝志) 권91~98 (6권): 선비들의 독서법 등을 비롯한 취향을 기르는 각종 기예를 풀이하였다.
- 이운지 (怡雲志) 권99~106 (8권): 선비들의 취미생활에 관해 서술하였다.
- 상택지 (相宅志) 권107~108 (2권): 조선 땅의 지리 전반을 다뤘다.
- 예규지 (倪圭志) 권109~113 (5권): 조선의 사회경제를 다룬 것으로 양입위출(量入爲出)·절생(節省)·계금(戒禁)·비예(備豫) 등을 다룬 것과 무역이나 치산(置産) 등을 다룬 화식(貨殖) 등이 논술하였다. 전국의 시장 날짜까지 수록하였다.
번역 및 출간
편집1930년대 일제하에서 국학(國學) 붐이 일면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도 주목을 받았으나 워낙 분량이 방대하고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어 다들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려대 유전공학과를 졸업하고, 도올서원과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공부한 정명현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2008년 3월 임원경제연구소를 차리고 본격적인 번역 작업에 돌입했다.[4]
순수 민간연구소인 만큼 일반의 후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5] 2015년에는 풍석문화재단이 설립되어 《임원경제지》 번역 지원과 학술대회 개최, 요리연구소[6]의 운영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기타 저서
편집가족 관계
편집- 고조부: 서문유(徐文裕)
- 증조부: 서종옥(徐宗玉)
- 종조부: 서명익(徐命翼)
- 종조부: 서명성(徐命誠)
- 숙부: 서형수(徐瀅修) - 생부 서명응(徐命膺)의 차남, 종조부 서명성(徐命誠)에게 양자로 출계
- 조부: 서명응(徐命膺)
- 조모: 이정섭(李廷燮)의 딸
- 숙부: 서낙수(徐樂修)
- 숙부: 서책수(徐策修)
- 숙부: 서채수(徐采修)
- 양부: 서철수(徐澈修) - 양부이자 숙부
- 숙부: 서유수(徐柔修)
- 증조부: 서종옥(徐宗玉)
현대적 평가
편집동시대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법과 제도를 개혁하여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면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를 통해 백성들이 좀 더 잘사는 '풍요로운 나라'를 그리려고 했다. 그는 당시 성리학에 매몰된 선비들이 입만 살아서 "흙으로 끓인 국과 종이로 만든 떡"(토갱지병, 土羹紙餠)을 일삼는다고 비판했다.
서유구는 바로 이러한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어, 한 사람이 했다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선과 중국의 문헌을 참조하고 인용·정리해가며 《임원경제지》에 하나라도 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지식·정보를 담으려고 애썼다. 그는 문화 콘텐트의 보고라 할 수 있는, 다방면에 달통한 보물창고를 후대에 전한 셈이다. 200년 전의 고루한 내용이 아니고 지금 농촌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365일 일상을 재구성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라 할 수 있다.[9]
각주
편집- ↑ 박종인, "흙으로 만든 국과 종이로 만든 떡(토갱지병, 土羹紙餠)을 누가 먹으랴!" - 실용주의 관리 서유구가 난세에 대처한 자세 ①, 조선일보, 2020년 12월 16일.
- ↑ 그러나 서우보는 편찬 작업 도중 1827년에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서유구는 비통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출한다. 서유구, 《금화지비집》 권5, 祭亡兒生日文, “我實不慈。閡汝願欲。郭西曲巷。近置小宅。不逮汝生。乃棲汝魄。筆硏左設。帷幌前隔。櫝藏帖括。掌大卅冊。麻姑細字。悉汝心畫。汝去何處。遺下此笈。俯仰無覿。叩之無答。已矣已矣。無可及矣”。
- ↑ 정조지에서 소개하고 있는 전통주 제조법만 160여 가지에 이르러 역자들은 전통주 제조 수업을 듣고 실제로 제조법을 적용함으로써 구체적인 검증을 마쳤다.
- ↑ 정명현 소장은 서울대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담긴 해양 박물학의 성격」으로 석사를 마쳤으며, 동 대학원에서 서유구의 농업정책서인 《의상경계책》을 역주하고 분석하는 박사 논문을 썼다. 「본리지」를 김정기와 함께 번역하였고, 「본리지」의 설명대로 파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 ↑ 2003년에 정명현 소장이 영어 강사로 잠시 근무했던 영어학원의 원장인 송오현 DYB 교육 대표가 거금을 쾌척하고 수십 명의 후원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비용을 대 2009년부터 순차적으로 출간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번역자들이 파트타임으로 작업을 하는 까닭에 진척은 더디지만 모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박정호, "252만자 보물창고를 캐다, 더 잘사는 나라를 그리다", 중앙일보, 2019년 7월 18일.
- ↑ 풍석음식연구소의 곽미경 소장은 《임원경제지》에 실린 요리를 골라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전통 레시피를 중심으로 《조선셰프 서유구》(씨앗을 뿌리는 사람)라는 책을 2016년 4월에 출간하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고추가 들어오기 전에는 초피나무 열매로 만든 초피에 찹쌀가루와 간장을 섞어 전천초라는 지짐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신준봉, "곽미경 소장 인터뷰" 중앙일보, 2016년 5월 26일.
- ↑ 원래는 산일되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일본 도쿄도립중앙도서관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분량은 제8권이 빠진 총 7권 7책이다. 또한 이 책에서 김영(金泳: 1749년~1817년, 본관은 김해, 진주시 출신)의 저술인 《기삼백해》(朞三百解)와 《역상계몽》(易象啓蒙)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 ↑ 서유구가 1838년에서 1840년까지 지은 시를 모은 시집이다.
- ↑ 박정호, 위의 중앙일보 2019년 7월 18일자 기사 참조.
-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농촌 경제와 사회 변동〉"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
편집- 서유구 두산백과 두피디아
- 임원경제지 설명 엠파스/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 서유구와 ‘임원경제지’ 강명관 교수 (부산대 한문학), 주간동아, 2007년 4월 579호
- 조선후기 달성서씨가의 학풍과 실학: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통해 본 서유구의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 안대회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 한국실학연구 제11집,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