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
프란시스코 호세 데 파울라 산탄데르 이 오마냐(스페인어: Francisco José de Paula Santander y Omaña, 1792년 4월 2일 ~ 1840년 3월 6일)는 콜롬비아의 군인, 정치인이었으며, 국민적 영웅이기도 했다. 1832년부터 1837년까지 대통령직을 맡기도 했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
Francisco José de Paula Santander y Omaña | |
---|---|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 | |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의 제1대 대통령 | |
임기 | 1832년 3월 10일~1837년 4월 1일 |
부통령 | 호세 이그나시오 데 마르케스 |
전임: 호세 마리아 오반도(0대) 후임: 호세 이그나시오 데 마르케스(2대)
| |
신상정보 | |
출생일 | 1792년 4월 2일 |
출생지 | 스페인령 누에바그라나다 쿠쿠타 |
사망일 | 1840년 3월 6일 | (47세)
사망지 |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보고타 |
국적 | 스페인령 누에바그라나다 → 그란콜롬비아 →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
정당 | 연방주의자 |
배우자 | 식스타 툴리아 폰톤 이 피에드라히타 |
자녀 |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헤수스 바르톨로메오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생애
편집1792년 4월 2일, 콜롬비아의 쿠쿠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카오 농장을 경영하는 유명한 크리올계였다. 1810년, 그는 18세의 젊은 나이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독립 운동에 참여하기 전, 그는 법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시몬 볼리바르의 부관으로 1819년 8월 7일에 보야카 전투에서 스페인에게 승리하였고, 그들을 콜롬비아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1821년 11월 3일에 그란콜롬비아의 부통령직을 맡게 된다. 시몬 볼리바르는 남미의 독립을 위해 투쟁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산탄데르는 연방제를 주장했다. 결국 둘은 대립하고, 산탄데르는 1827년 9월 19일에 사임하였다. 1828년 9월 25일에 있었던 시몬 볼리바르의 암살 미수 사건과 관련하여 사형을 선고받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 프랑스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징역형에 처해지게 된다.
1832년에야 귀국하여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의 대통령직을 맡게 된다. 정교분리 정책을 추진하고 노예 무역의 폐지, 공교육의 확립, 보호 무역에 의한 산업의 발전 등 민정에 힘을 쏟았다.
역대 선거 결과
편집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1차 득표율 | 1차 득표수 | 2차 득표율 | 2차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825년 선거 | 그란콜롬비아의 대통령 | 1대 | 무소속 | 1.64% | 10표 | 3위 | 낙선 | ||
1825년 선거 | 그란콜롬비아의 부통령 | 5대 | 무소속 | 46.57% | 285표 | 71.43% | 70표 | 1위 | |
1832년 선거 |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의 대통령 | 4대 | 무소속 | 75.38% | 49표 | 1위 | |||
1833년 선거 |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의 대통령 | 4대 | 무소속 | 80.13% | 1,012표 | 1위 |
외부 링크
편집전임 (권한대행)호세 마리아 오반도 |
제4대 그란콜롬비아의 대통령 1832년 3월 10일 ~ 1832년 11월 26일 |
후임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의 대통령)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 |
전임 (그란콜롬비아의 대통령)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 |
제1대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의 대통령 1832년 11월 26일 ~ 1837년 4월 1일 |
후임 호세 이그나시오 데 마르케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