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몽재 유지(訓蒙齋 遺址)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하서 김인후의 교육에 관련된 유적지이다.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2길 83에 있다.

훈몽재 유지
(訓蒙齋 遺址)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문화재자료
종목문화재자료 제189호
(2012년 11월 2일 지정)
위치
훈몽재 유지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훈몽재 유지
훈몽재 유지
훈몽재 유지(대한민국)
주소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2길 83
좌표북위 35° 28′ 18″ 동경 126° 58′ 08″ / 북위 35.47167° 동경 126.96889°  / 35.47167; 126.96889
정보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2012년 11월 2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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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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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는 조선 중기 대표적 성리학자로, 1510년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에서 출생하였다.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퇴계 이황을 만나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에 등용되었다. 1541년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였다. 이후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

1543년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어 당시 세자이던 인종을 가르쳤다. 이후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 검토관이 되어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을 문신으로서 처음 개진하였다. 그러나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 같은 상황을 견딜 수 없어 하며 연로하신 부모 봉양의 걸양을 청하여 그해 겨울 12월 고향과 가까운 옥과현감에 제수되었다.

1545년 인종이 즉위한 후 8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자, 이에 충격을 받아 심장병이 발작하여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이내 소생하였다. 곧이어 을사사화가 발생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훈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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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년(명종 3년) 문정왕후를 위시한 집권 세력이 을사사화를 이르키자 이를 피해 처의 고향인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은거하여 초당(草堂)을 짓고 편액을 훈몽이라 걸고 강학과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냈다.

훈몽재에서 남쪽으로 400미터쯤 가면 동쪽 추령천 위에 수십 인이 앉을 만 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이곳에서 고암 양자징을 비롯한 월계 조희문, 호암 변성온, 금강 기효간, 영웅 이지남 등 여러 제자들과 더불어 《대학》을 강론하였는데, 세상이 이를 『대학암』이라 일컫는다.

훗날 송강 정철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곳 바위에 『大學巖』이라 각자하였다고 한다.[2]

이와 같이 하서 김인후는 자연에 귀의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체 시와 술을 벗 삼아 유유자적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은 태평스러웠다. 이러한 마음을 표현한 시(詩)가 『자연가』이다.

자연가(自然歌)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도 절로 물도 절로하니, 산수간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삼긴 인생이라, 절로 절로 늙사오리.

1549년(명종 4) 봄 2월 《대학강의》 발문을 짓고,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를 얻어 보고 이를 대폭 수정 보완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한 《천명도》를 저술하여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해 10월 부친 참봉공 상을 당하여 고향 장성으로 돌아갔다.[3]

복원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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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몽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680년김인후의 5세손인 자연당 김시서가 장성에서 이곳에 은거하여 선조 하서 김인후의 유업을 계승하고자 훈몽재를 수축하고, 그 옆에 초당 자연당을 지어 학문을 닦으며 명사들과 교유하였다.[4]

세월이 흘러 훈몽재가 퇴락하자 1827년(순조 27) 후손과 순창 유림들의 공의로 사우 건립을 도모하여, 1831년(순조 31) 어암서원을 건립하고 하서 김인후를 주향으로 율곡 이이, 송강 정철, 자연당 김시서를 배향하였다. 훈몽재의 재실은 재력이 넉넉하지 못하여 미쳐 수리하지 못하고 있다가 1840년(헌종 6)에 완성을 보았다. 이후 1864년(고종 1) 흥선 대원군서원 철폐령때 훼철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중건되었으나, 1951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2003년 강인형 순창군수가 하서 김인후 선생의 정신과 가르침을 계승 발전시키고 그 역사적 가치를 관광자원화 하기 위해 「훈몽재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이 지역 출신이자 후손인 백은(栢隱) 김상열(金相烈)이 거액을 들여 선조 하서 김인후가 《대학》을 강마하던 대학암 근처 「훈몽재 유지」로 추정되는 부지를 매입하여 순창군에 기부하여 6년에 걸쳐 2009년 훈몽재와 자연당, 양정관, 삼연정으로 이어지는 목조 한옥을 복원하였다.[5],[3]

2011년 1월부터 유학자 고당(古堂) 김충호(金忠浩)가 훈몽재 산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훈몽재에서는 예절교육 및 한학 등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더불어 숙박공간을 조성하여 아이들과 함께 방문하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또 2013년에는 수강생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집합 교육시설과 취사장을 갖춘 양생당도 건립했다.[6]

역사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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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호남 성리학을 이끌어간 대표적 학자인 하서 김인후의 교육에 관련된 유적지로서, 전북지역 유학 발달사에 있어서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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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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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라북도 고시 제2012-278호, 《전라북도 문화재(민속문화재,문화재자료) 지정고시》, 전라북도지사, 전라북도 도보 제2348호, 65면, 2012-11-02
  2. 가사 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경상도 영일로 유배된 부친 정유침이 1551년(명종 6) 원자 탄생의 특사로 풀려나자 부친과 함께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으로 이주한 후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김인후·송순·기대승에게 학문을 배웠다. 1562년(명종 17)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간 후 1581년(선조 14)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3. 김종완 기자 (2012년 11월 6일). “훈몽재 유지, 도 문화재자료 지정”. 새전북신문. 2014년 4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4월 6일에 확인함. 
  4. 교유 명사들인 문곡 김수항은 시를 짓고 사실을 서(序)하여 선업을 계승한 것을 장려하였으며, 몽와 김창집,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 포음 김창즙, 봉곡 송주석, 소재 이이명, 한포재 이건명, 단암 민진원 같은 뭇 어진 이들도 역시 다 구경하고 시를 써서 고산경행(高山景行)의 사모를 서술하였다.
  5. 전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15~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붓솔, 유리구슬, 기와 등 70여 점의 다양한 유물이 발견하여 훈몽재 유지로 추정되는 건물지를 확인하였다.
  6. 이종근 교육문화부장 (2014년 5월 8일). “(온누리) 순창 훈몽재(訓蒙齋)”. 새전북신문. 2014년 6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6월 2일에 확인함. 
  7. 디지털순창문화대전 [1]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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