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인지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동쪽의 대문이다. 속칭은 동대문(東大門)으로, 이는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다.[주 1]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1]
대한민국의 보물 | |
종목 | 보물 (1963년 1월 21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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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시대 |
소유 | 국유 |
위치 |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88 |
좌표 | 북위 37° 34′ 16″ 동경 127° 00′ 35″ / 북위 37.57111° 동경 127.00972° |
흥인지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처음 지어졌다. 1453년(단종 1년)과 1869년(고종 6년)에 고쳐 지었다. 본래 흥인지문은 동대문구에 속했고, 구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되었으나 수차례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현재는 종로구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은 왕이 사는 집(家)인 경복궁(景福宮)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4대문을 지었는데 그중 동쪽에 위치한 문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역사
편집흥인지문은 일대의 지반이 낮아 땅을 돋운 뒤 건설하여야 해서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에도 공사중이었으며[2], 1398년(태조 7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 때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1451년(문종 1년) 3월에는 도성을 고쳐 쌓은 뒤 기한이 남아, 흥인지문을 혜화문과 더불어 수리하였다.[3] 같은 해 10월에 본격적인 흥인지문 정비를 시작하여[4], 1453년(단종 1년) 5월에 완료하였다.[5]
1724년(영조 즉위년)에는 발인 때 상여가 나가기가 쉽게 하기 위하여, 국장도감에서 건의한 대로 흥인지문의 박석을 파내려갔다.[6] 1868년(고종 5년)에는 흥인지문이 크게 손상되었기에 의정부에서 그 수리를 요청하였다.[7] 이듬해 3월에 중수를 끝냈다.[8] 이 즈음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운을 북돋기 위하여 특별히 지(之)자를 넣어 넉 자로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흥인지문의 현판은 4대문 중 유일하게 4글자,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1907년(고종 44년) 3월에는 흥인지문과 숭례문의 좌우측 성벽을 8칸씩 헐어 전차 선로를 부설하였다.[9]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 1호로 지정되었는데, 이것이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10]
1999년에는 옹성이 붕괴되어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3억여원을 들여 보수하였으나, 옹성 아랫부분이 튀어나오는 '배부름 현상'이 일어나 재시공을 결정하였다.[11] 지하철이 개통된 이후 지하수위가 낮아지고 지반이 침하되었으며[12], 2002년 12월부터 2007년 8월까지 옹성을 해체하여 지반 보강 후 복원하였다.[13] 2015년에는 도로를 내면서 끊어진 문 북쪽의 도성 자리에 석재를 포장하는 공사가 이루어졌다.[14]
건축적 특징
편집화강석으로 된 홍예문의 축석 위에 지어졌으며,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숭례문이 조선 초기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흥인지문은 조선 후기 양식으로 되어 있어 서로 대비된다.
현지 안내문
편집서울 흥인지문은 1398년(태조 7)에 세운 당시 서울 도성의 동쪽 문이다. 지금의 문은 1869년(고종 6)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당시 서울성곽에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세웠다. 동서남북의 사대문에는 각각 인(仁)·의(義)·예(禮)·지(智)의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그중 동쪽의 대문을 흥인문이라 하였다. 흥인지문은 서울의 숭례문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성문이다. 성벽과 이어진 축대에 아치형의 통로를 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워 성문을 만들었다. 서울의 성문 가운데 문루를 2층으로 만든 것은 숭례문과 흥인지문밖에 없다. 문루는 문을 지키는 장수가 머무는 곳으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했다. 문루 바깥으로는 벽돌로 된 담장과 나무판으로 된 창문을 설치해서 적을 막는 데 유리하게 하였다. 흥인지문의 문루는 전체 구조는 간단하지만 장식이 많은 19세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반영한다. 또 흥인지문의 앞에 적을 막기 위한 반달 모양의 옹성을 둘렀는데, 이는 서울 성문 가운데 유일하다.[15]
사진
편집-
1904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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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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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과 주변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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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벽
사건사고
편집2018년 3월 9일 새벽 1시 49분경 40대 남성이 흥인지문의 누각에 몰래 침입하여 미리 준비한 종이박스에 불을 붙였으나[16], 다행히 흥인지문은 담장 일부가 그을리는 데에 그치고 방화범은 당일 체포되었다.[17] 흥인지문은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하여 동묘, 창의문, 경교장 등과 함께 종로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16]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내용주
- ↑ 《태조실록》에는 홍화문은 속칭 동소문(東小門), 흥인문은 속칭 동대문(東大門), 광희문은 속칭 수구문(水口門), 숭례문은 속칭 남대문(南大門), 소덕문은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였다고 적혀 있다.
- 참조주
- ↑ 관보 호외 1963년 1월 21일. 외229-외240(1-12)쪽. 외229(1)쪽. 문교부고시제173호. 보물재지정목록. 문교부장관. 2016년 5월 26일 확인함.
- ↑ 《태조실록》 10권 5년 9월 24일,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 보내다. 각 문의 이름. 국사편찬위원회, 위키문헌
- ↑ 《문종실록》 6권 1년 3월 17일, 당령 선군과 방패·섭육십을 징용하여 도성을 수축하다. 국사편찬위원회
- ↑ 《문종실록》 10권 1년 10월 1일, 좌의정 황보인에게 흥인문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 ↑ 《단종실록》 6권 1년 5월 5일, 이명민을 불러서 창덕궁·인정전과 흥인문·수문의 역사를 끝마치게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 ↑ 《영조실록》 2권 즉위년 11월 25일, 국장 도감에서 발인 습의 때 대여의 높이에 부족한 흥인문을 고치기를 청하자 그대로 따르라. 국사편찬위원회
- ↑ 《고종실록》 5권 5년 9월 7일, 중추부 등 아문을 중건하고 성문을 수리하도록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 ↑ 《고종실록》 6권 6년 3월 16일, 흥인문 공사가 끝났으나 물길이 막혀 따로 수문 한 곳을 뚫다. 국사편찬위원회
- ↑ 《고종실록》 48권 44년 3월 30일, 동, 남 두 대문의 좌우 성첩을 각각 8간씩 헐어 버리다. 국사편찬위원회
- ↑ “숭례문 일제 때 파괴될 뻔 했다”, 《경향신문》, 2003.09.02.
- ↑ 보물 1호 흥인지문 부실 복원, 《연합뉴스》, 2000.12.09.
- ↑ 동대문 균열 가속화 주변 지반침하 심각, 《경향신문》, 2003.03.26.
- ↑ 흥인지문 원형 찾았다… 서북옹성 5년 8개월만에 복원 끝내, 《국민일보》, 2007.08.02.
- ↑ “한양도성 안으로 진입합니다” 끊어진 서울의 도성 흔적 되살린다, 《경향신문》, 2015.10.18.
- ↑ 현지 안내문 인용
- ↑ 가 나 숭례문 화재 10년만에…흥인지문 방화에 문화재 관리 또 도마(종합), 《연합뉴스》, 2018.3.9.
- ↑ 하마터면… ‘보물 1호’ 동대문 불탈 뻔, 《세계일보》, 2018.3.9.
외부 링크
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흥인지문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서울 흥인지문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서울 성곽 답사의 첫 관문, '흥인지문'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