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 계씨
수안 계씨(遂安 桂氏)는 지금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황해북도의 수안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관향이다.
나라 |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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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황해북도 수안군 |
시조 | 계석손(桂碩遜) |
집성촌 | 평안북도 선천군 평안북도 강계군 |
주요 인물 | 계지문, 계유명, 계덕해, 계덕신, 계화, 계봉우, 계창림, 계명수, 계연수, 계응상, 계용묵, 계지풍, 계광순, 계철순, 계창업, 계훈제, 계희열, 계형철, 계은숙, 계순희, 계범주 |
인구(2015년) | 6,056명 |
역사
편집수안 계씨(遂安 桂氏)의 시조 계석손(桂碩遜)은 명나라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내다가, 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의 명으로 인하여, 1394년(명 홍무제 26)에 조선에 예학(禮學) 전수를 위해 파견되었고, 결국 1407년(조선 태종 7)에 조선에 귀화하여 수안백(遂安伯)에 봉해졌다고 한다.[1] 수안계씨족보(遂安桂氏族譜)에 따르면, 계석손은 명나라 성양태수(城陽太守)를 지낸 계경횡(桂炅橫)의 셋째 아들이다.
계석손의 아들 계원우(桂元祐), 계원조(桂元祚), 계원시(桂元禔), 계원겹(桂元袷) 4형제 중 맏아들 계원우(桂元祐)가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냈고, 그의 아들 계문식(桂文植)은 우대언(右代言)을 역임하며 왕명(王命)으로 궁중의 출납을 맡았다.
분파
편집계석손의 큰 아들인 계원우(桂元祐)는 선천(宣川)으로, 둘째 아들인 계원조(桂元祚)는 강화(江華)로, 셋째 아들 계원시(桂元禔)는 강동(江東)으로 각각 이주하였다. 이후 16세손 계덕룡(桂德龍)이 삭주에 터를 잡았고 그 자손은 의주까지 퍼져가서 계씨가 평안도를 중심으로 세거하였다.
계원조(桂元祚)의 셋째 아들 계양춘(桂陽春)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첨사(僉使)를 지낸 후 강화(江華)로 들어가 강화파(江華派)의 파조(派祖)가 되었으며, 원의 후손에서는 강동파(江東派)를 비롯한 영유(永柔), 증산(甑山), 용강(龍岡) 등 7파(派)로 분파되었다. 그러나 원겹(元袷)의 후손들은 평양지방(平壤地方)에 산거(散居)하며 세계(世系)를 이었으나 보첩수단(譜牒收單) 과정에서 선계(先系)를 실전(失傳)하여 12세(世)를 알 수 없다.
본관
편집계씨의 본관은 수안(遂安)을 비롯하여 금천(衿川) 충주(忠州) 전주(全州) 나주(羅州) 해남(海南) 경주(慶州) 강릉(江陵) 원주(原州) 연안(延安) 초산(楚山) 등 12본이 더 전하고 있으나, 현재는 수안 계씨 1본으로 합본하고 나머지는 세거지로 파악하고 있다. 계씨는 평안북도 선천(宣川)과 강계(江界)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의 명문으로 알려져 왔다.
인물
편집- 계빈(桂斌) : 도호부사(都護府使)
- 계반(桂斑) : 조방장(助防將)
- 계봉우(桂奉瑀):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
- 계지문(桂之文) :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아들 계천상(桂天祥)·계익상(桂益祥)과 의병을 일으켜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1682년(숙종 8) 조정에서 그 공훈을 기려 정려를 세웠다.
- 계유명(桂惟明) :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선천성(宣川城)을 지켰으며, 숙종 때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간 김수항(金壽恒)이 계유명의 시를 조정에 보고하여 효행과 충절이 알려져 정려가 세워지고 선교랑(宣敎郎)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다.
- 계태형(桂泰衡) : 학자로서 노천(魯川)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후세 교육에 진력하여 선천군 대산(宣川郡臺山)의 목동서원(睦洞書院)에 주자(朱子), 율곡(栗谷)과 함께 동향(同享)되고 있다.
- 계덕신(桂德新) : 1768년(영조 44)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禮曹左郞)을 역임하였다.
- 계덕해(桂德海, 1708년 ~ 1775년) : 영조 때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예빈시참봉이 되고, 1774년 평안도 별시(別試)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예조좌랑, 찰방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봉곡계찰방유집》이 있다.[2]
- 계화(桂和) : 만주에서 중광단(重光團), 대한정의단,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을 조직하고 재무부장으로 군자금모금활동에 주력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계응상(桂應祥, 1893년 ~ 1967년) : 북한의 농학자로 1957년 최고인민회의 2기대의원, 1961부터 1964년까지 농업성 농업과학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 계용묵(桂鎔默, 1904년 ∼ 1961년) : 소설가
- 계철순(桂哲淳, 1912년 ~ 2003년) : 제4대 경북대학교 총장
- 계창업(桂昌業, 1916년 ~ 1999년) : 대법원 판사
- 계만기(桂萬基) :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 계희열(桂禧悅, 1936년 ~ ) : 고려대학교 법학과 교수
- 계경문(桂京汶, 1956년 ~ ) :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계명찬(桂命贊, 1963년 ~ ) : 한양대학교 생명과학전공 교수
- 계승범(桂昇範, 1964년 ~ ) :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과거 급제자
편집수안 계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 무과 급제자 10명, 사마시 10명 등 과거 급제자 23명을 배출하였다.
- 문과
계덕신(桂德新) 계덕해(桂德海) 계용혁(桂龍赫)
- 무과
계덕봉(桂德奉) 계덕흥(桂德興) 계봉렬(桂鳳烈) 계원령(桂元翎) 계유령(桂惟齡) 계의인(桂義仁) 계인기(桂仁基) 계일행(桂一行) 계춘우(桂春佑) 계학려(桂鶴唳)
- 생원시
계명기(桂命夔)
- 진사시
계덕순(桂德淳) 계덕해(桂德海) 계성실(桂成實) 계연모(桂淵模) 계욱(桂勗) 계천기(桂天機) 계태근(桂泰根) 계혁주(桂爀周) 계형붕(桂馨朋)
인구
편집- 1985년 1,451가구 5,704명
- 2000년 1,951가구 6,242명
- 2015년 6,056명
각주
편집- ↑ “수안 계씨”. 《부천 족보 전문 도서관》.
- ↑ 계덕해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