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식 (축구인)
김용식(金容植[출처 필요], 1910년 7월 25일~1985년 3월 8일[1])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다. 본관은 개성(開城)이다.[출처 필요] 한국이 일제강점기인 시절에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긴 요쇼쿠(일본어: 金 容植, きん ようしょく)라는 이름으로 1936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해방 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플레잉코치로 발탁되어 1948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이후 대표팀 감독을 맡으며, 1954년 FIFA 월드컵, 1960년 AFC 아시안컵 등의 국제 대회에서 지휘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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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 | ||||||
로마자 표기 | Kim Yong-Sik | |||||
출생일 | 1910년 7월 25일 | |||||
출생지 | 대한제국 황해도 신천군 | |||||
사망일 | 1985년 3월 8일 | (74세)|||||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키 | 172cm | |||||
포지션 | 미드필더 / 공격수 | |||||
청소년 구단 기록 | ||||||
1930–1931 1932-1937 |
숭실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 |||||
구단 기록* | ||||||
연도 | 구단 | 출전 | (득점) | |||
1933-1940 1934 1937 1940-1942 ? 1946-1947 1946-1950 1950-1952 |
경성 축구단 → 조선 축구단 와세다 대학 평양 축구단 교통부 축구단 서울 축구단 조선전업 축구단 육군 축구단 | |||||
국가대표팀 기록‡ | ||||||
1936-1940 1948 |
일본 대한민국 |
3 (0) 2 (0) | ||||
지도자 기록 | ||||||
1954 1961 1962 1968 1969 1981-1982 |
대한민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양지 축구단 대한민국 할렐루야 축구단 | |||||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또한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마지막 리그 경기 기준임. ‡ 국가대표팀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마지막 리그 경기 기준임. |
어린 시절
편집황해도 신천에서 아버지 김주역의 슬하 3남 2녀 중 셋째아들이자 막내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경기도 개성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경성부에서 성장하였다. 경성 경신고등보통학교와 경성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클럽 경력
편집1935년, 경성 축구단의 멤버로 전일본선수권대회(현재의 천황배)에서 우승하였다. 경성 축구단 이후에는 조선전업 축구단(현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축구단의 비공식 전신), 육군 축구단에서 활동하였다.
교통부 축구단(현 대전 코레일 축구단)에서도 잠깐 활동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2]
국가대표팀 경력
편집1936년에 베를린에서 개최된 1936년 하계 올림픽에 일본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조선 선수로는 유일하게 축구 종목에 출전하였다. 이 대회에서 〈베를린의 기적〉이라 불리던 8강 진출에 성공하였다. 이 대회에서 베를린으로 떠나는 배 갑판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영국의 축구기술 서적을 읽고 축구는 체력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때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훈련하는 이른바 ‘1만 일 훈련’을 1936년 11월 15일에 시작해 1979년 1월 15일 마침내 뜻을 이룬다.[1][3]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대한민국 대표로 출전하여 8강까지 진출하였다. 1952년에 현역에서 은퇴하였고. 1954년 FIFA 월드컵에서는 감독으로 참가하여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일구어 냈다. 이 대회에서 김용식 감독은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4]
지도자 경력
편집행정가 경력
편집대한축구협회 부회장 겸 기술지도위원장을 지냈다.
심판 경력
편집한국인 최초로 FIFA 국제심판 자격증을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상 내역
편집지병으로 타계한 1985년에 체육훈장 맹호장이 수여되었다. 2004년 대한축구협회가 추천한 FIFA '100주년 인물'이었기도 하며 2005년 홍덕영, 차범근, 거스 히딩크 감독 등 여섯 명과 함께 대한축구협회가 선정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5]
현재 서울월드컵경기장에 있는 월드컵 기념관에 흉상이 장식되어 있다.
기록
편집국가대표팀
편집# | 날짜 | 장소 | 홈 팀 | 최종 결과 |
원정팀 | 대회 | 득점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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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936년 8월 4일 | 베를린 | 일본 | 3 - 2 | 스웨덴 | 1936년 하계 올림픽 | - | |
2 |
1936년 8월 7일 | 베를린 | 이탈리아 | 8 - 0 | 일본 | 1936년 하계 올림픽 | - | |
3 |
1940년 6월 16일 | 니시노미야 | 일본 | 1 - 0 | 필리핀 | 친선 경기 | - |
# | 날짜 | 장소 | 홈 팀 | 최종 결과 |
원정팀 | 대회 | 득점 | 비고 |
---|---|---|---|---|---|---|---|---|
1 |
1948년 8월 2일 | 런던 | 대한민국 | 5 - 3 | 멕시코 | 1948년 하계 올림픽 | - | |
2 |
1948년 8월 6일 | 런던 | 스웨덴 | 12 - 0 | 대한민국 | 1948년 하계 올림픽 | - |
각주
편집- ↑ 가 나 “[최원창] 올림픽 도전 60년 '영원한 스승' 김용식 선생을 떠올린다]”. 일간스포츠. 2008년 7월 26일.
|제목=
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 思友(사우) 잊을 수 없는 그때 그친구 <38> 金容植(김용식) <한국OB축구회회장 서울OB축구단회장> (3) 소꿉친구 李裕瀅(이유형)군
- ↑ 김용식 | 그라운드의 성자, 《SPORTS 2.0》, 2006년 6월 21일 작성.
- ↑ <2006 독일월드컵-역대 월드컵 팀 감독 열전>1954년 “한골만 넣자”-2002년 “배가 고프다”, 《문화일보》, 2006년 2월 28일 작성.
- ↑ “축구 명예의 전당에 홍덕영, 차범근 등 7명 헌액”. 마이데일리. 2005년 3월 17일. 2008년 10월 10일에 확인함.
참고 문헌
편집- 잃어버린 우리 축구사 복원 프로젝트 5화 - 일본이 기억하고 한국이 잊은 축구의 신 김용식
- 잊혀진 '축구계 손기정' 김용식 선생
- 思友(사우) 잊을 수 없는 그때 그친구 <36> 金容植(김용식) <한국OB축구회회장 서울OB축구단회장> (1) 蹴球(축구)외길人生(인생) 蔡金錫(채김석)형
- 思友(사우) 잊을 수 없는 그때 그친구 <37> 金容植(김용식) <한국OB축구회회장서울OB축구단회장> (2) 영원한맞수 金成玕(김성간)형 金容植(김용식)
- 思友(사우) 잊을 수 없는 그때 그친구 <38> 金容植(김용식) <한국OB축구회회장 서울OB축구단회장> (3) 소꿉친구 李裕瀅(이유형)군
- 思友(사우) 잊을 수 없는 그때 그친 <39> 金容植(김용식) <한국OB축구회회장 서울OB축구단회장> (4) 나의 分身(분신) 朴奎楨(박규정) ·閔丙大(민병대)군
- 思友(사우) 잊을 수 없는 그때 그친구 <40> 金容植(김용식) <한국OB축구회회장 서울OB축구단회장> (5) 義俠(의협)남아 趙啓永(조계영)씨
- 김용식 先生
같이 보기
편집외부 링크
편집전임 이유형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54년 6월 |
후임 박정휘 |
전임 정국진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60년 3월 |
후임 위혜덕 |
전임 박일갑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69년 1월 - 1969년 10월 |
후임 강준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