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공주 (고려)
낙랑공주(樂浪公主. 생몰년 미상) 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儀公主)는 고려 태조의 딸이며 경순왕의 후비이다.
낙랑공주
樂浪公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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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의 공주 | |
이름 | |
별호 |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 |
신상정보 |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미상 |
부친 | 태조 |
모친 | 신명순성왕후 유씨 |
배우자 | 경순왕 |
자녀 | 미상 |
개요
편집낙랑공주는 태조(太祖)와 신명순성태후(神明順成太后) 유씨(劉氏)의 딸로, 신라의 경순왕과 혼인하였다.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으로도 일컬어진다.
생애
편집935년 11월 22일, 태조 왕건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金傅)가 입조(入朝)하자 정전(正殿)에 나와 백관을 모아놓고 예를 갖추어 경순왕과 낙랑공주의 혼인을 거행하였다.
이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가족 관계
편집자녀 등장
편집고려·조선조에 경순왕 후손들에 대한 군역·부역 면제 등의 특전이 계속 내려지면서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경순왕 후손으로서 특전을 누린 이들이 있었다. 이런 현상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더욱 심해져,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각 씨족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 족보를 발간하면서 자신들의 조상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근거 없이 시호나 군호를 붙여놓기도 하고 상계를 경순왕대까지 끌어 올리는 등 족보의 위·변조가 극에 달한다.
《김은열 묘지명》
편집1784년(정조 8)에 개성 어느 산 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석」을 바탕으로 김노규(金魯奎)가 기사한 《김은열 묘지명》에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 후 8자들을 두었는데 『일(鎰)·굉(鍠)·명(鳴)·은열(殷說)·중석(重錫)·건(鍵)·선(鐥)·종(鐘)』이라 한다.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
편집이후 1785년 김사목(金思穆)은 경주 김씨 족보를 수보(修普) 하면서 추기한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에 2자 '굉'(鍠)을 '황'(湟)으로, 3자 '명'(鳴)을 '명종'(鳴鍾)으로 개명하고, 4자 은열(殷說)의 시호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이라 작호(作號) 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3][4] 그리하여 8자들을 『일(鎰)·황(湟)·명종(鳴鍾)·은열(殷說)·중석(重錫)·건(鍵)·선(鐥)·종(鐘)』이라 한다.
《묘지명》 진위 여부
편집《김은열 묘지명》의 형태는 배위(配位) 및 생애 등이 누락되어 있고,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묘지명》에 나오는 아들들의 이름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묘지명》은 나라의 역사 기록들과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의문을 갖게 된다.
또한 《김은열 묘지명》 원본에도 2자 '김굉'(金鍠)과 4자 '김은열'(金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왕씨(王氏) 소생으로(2자가 낙랑공주 소생이라는 說은 근거 없는 虛說임, 고려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하사해 주었다고 한다.
《신라경순왕전비》
편집1814년(순조 14) 강릉인 김계락(金啓洛)이 찬하고,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비석에 《신라경순왕전비》에 경순왕은 전비 박씨와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태자(太子)·차자(次子)·영분공자(永芬公子)이고, 딸은 고려 경종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또 후비 왕씨와의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1자 일(鎰)·2자 황(湟)·3자 명종(鳴鍾)은 배척하고, 제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제8자 '종'(鐘)을 '추'(錘)로 개명하여 『은열(殷說)·석(錫)·건(鍵)·선(鐥)·추(錘)』 5자들 두었으며, 2녀는 『경주 이씨 이금서(李金書)·장수 황씨 황경(黃瓊)』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5]
작금에 들어서는 《김은열 묘지명》의 제3자 '김명종'(金鳴鍾)의 시호가 '영분공'(永芬公)이라 하며, 경주 김씨 영분공파에서는 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러나 정작 ‘경주 김씨 영분공파’ 족보에는 영분공(永芬公)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다.[6][7][8]
문헌 왜곡
편집-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경순왕 8자들은 《고려사》 등의 문헌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생애 및 배위 등도 누락되어 있고,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묘지명 형태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 후손이라는 김사목은 《김은열 묘지명》을 족보에 옮기면서 2자 '굉'(鍠)을 '황'(湟)으로, 3자 '명'(鳴)을 '명종'(鳴鍾)으로 개명하고, 4자 은열(殷說)의 시호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이라 작호(作號) 하였다.
- 《신라경순왕전비문》에서는 1자 일(鎰), 2자 황(湟), 3자 명종(鳴鍾)을 누락하고, 제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제8자 '종'(鐘)을 '추'(錘)로 개명하였다. 또 2녀를 추가하였다.
- 《김씨 분관록》에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는 8자들은 모두 배척하고, 《신라경순왕전비》에 경순왕과 후비 왕씨 소생 중 '석(錫), 선(鐥), 추(錘)' 3명에 대해서만 군호를 붙여 의성군 석(錫), 언양군 선(鐥), 삼척군 추(錘)라 하며 시조로 기록하였다.
- 이후 경주 김씨 일문에서는 《신라경순왕전비문》을 재차 왜곡하여 전비 죽방부인 소생의 태자의 이름을 '일'(鎰)이라 하고, 둘째 왕자를 '황'(湟)이라 하며, 셋째 왕자가 명종(鳴鍾)이며 영분공(永芬公) 시호를 받았다고 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김은열 묘지명》 원본에는 2자 황(湟)과 4자 은열(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고려조에 평장사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까지 하사해 주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김은열 묘지명》등은 정사(正史)에 뒷받침 되지 않은 내용으로 조선 후기 족보 편찬 과정에 위조(僞造)된 지석(誌石)을 바탕으로 가탁(假託) 내지 조작(造作)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자녀 (추정)
편집- 1자 : 김일(金鎰) - 부령(부안) 김씨· 통천 김씨· 경주 김씨 태자파 시조로 소원시킴[9]
- 2자 : 김굉(金鍠, 김황(金湟)으로 개명, 고려 외손·공신·평장사) - 나주 김씨 비조로 소원시킴.[10][11]
- 3자 : 김명(金鳴, 김명종(金鳴鍾)으로 개명) - 경주 김씨 영분공파 파조로 소원시킴[12]
- 4자 : 김은열(金殷說, 고려 외손·공신·평장사·대안군(大安君) - 경주 김씨 은열공파 파조로 소원시킴[13]
- 5자 : 김중석(金重錫, 김석(金錫)으로 개명) - 의성 김씨 시조로 소원시킴[14]
- 6자 : 김건(金鍵) - (후)강릉 김씨 시조로 소원시킴[15]
- 7자 : 김선(金鐥) - 언양 김씨 시조로 소원시킴[16]
- 8자 : 김종(金鐘, 김추(金錘)로 개명) - 삼척 김씨· 선산 김씨 김추 계 시조로 소원시킴[17]
- 1녀 : 경주 이씨 이금서(李金書)에게 출가
- 2녀 : 장수 황씨 황경(黃瓊)에게 출가
낙랑공주가 등장하는 작품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외조부는 충주 지방의 호족으로 태사 내사령(太師 內史令)에 추증된 유긍달(劉兢達)이다.
- ↑ 《고려사》
- ↑ 월간조선 2015년 2월호 504페이지
- ↑ 인제문화원 '마의태자 유적지비'[1]
- ↑ http://gsm.nricp.go.kr/_third/user/search/KBD008.jsp?ksmno=8541]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
-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
-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 ↑ 경주김씨세보(慶州金氏世譜)
- ↑ 작금에 와서 부안 김씨· 통천 김씨· 경주 김씨 태자파에서 시조로 소원시키고, 1자 '김일'과 마의태자가 동일인이라 주장하며 서로 자신들의 시조라 한다. 그러나 사서(史書)에는 마의태자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하였으며, 《증보문헌비고》와 《조선씨족통보》도 별도 인물이라 기록하고 있다.
- ↑ 역사에 시조 김운발은 경순왕의 손자라 전하는데, 작금에 와서 일부 나주 김씨에서 시조 김운발의 아버지가 '김황'이라 한다. 또 경순왕 계자(季子. 막내아들)인 범공 스님과 동일인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김은열 묘지명》 원문에는
경순왕 2자 김굉(또는 김황)과4자 김은열은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고려 평장사를 지내고 나라에 공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도 하사(下賜)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서(史書) 및 《증보문헌비고》와 《조선씨족통보》에도 별도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 ↑ 계자(季子)란 막내아들을 의미하는데, 죽방부인 소생이라는 제2자 김굉(또는 김황)과 제3자 김명(金鳴)[또는 김명종(金鳴鍾)의 서차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여기서 경순왕시절에 막내왕자로 季子로 표기했을 것임)
- ↑ 작금에 와서 경주 김씨 일문에서는 '김명종'의 시호가 '김영분'(金永芬)이며, 경순왕과 죽방부인 사이의 셋째 왕자라 한다. 경주 김씨 영분공파 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서(史書)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로,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도 별도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 ↑ 일설에 경순왕 제3자라 한다.
- ↑ 일설에 경순왕 제4자라 한다.
- ↑ 작금에 와서 강릉 김씨 시조라 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 ↑ 일설에 제6자(第六子)라 한다.
- ↑ 작금에 와서 삼척 김씨와 선산 김씨에서는 서로 자신들의 시조라 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