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1913–1976)

남일(南日, 1913년 6월 5일 ~ 1976년 3월 7일)은 소련 육군 장교 군인을 지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육군 장군이며, 군인 및 정치인이다. 아명(兒名)은 남정욱(南正旭, 야코프 페트로비치 남[1], Я́ков Петрович Нам)이며, 한국 전쟁 당시에는 요직에 앉아 수많은 활동을 했으나 1976년, 교통사고라는 미명 하에 의문사 당했다.

남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무성 부상
임기 1948년 10월 6일 ~ 1949년 10월 11일
전임 강상호
후임 강상호
주석 김두봉
수상 김일성
장관 박일우 내무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교육성 부상
임기 1949년 10월 11일 ~ 1950년 8월 18일
전임 김종항
후임 김종항
주석 김두봉
수상 김일성
장관 백남운 교육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교통성 부상
임기 1953년 2월 1일 ~ 1953년 3월 14일
전임 김회일
후임 김회일
주석 김두봉
수상 김일성
장관 최용건 교통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문화선전성 제1부상
임기 1953년 4월 11일 ~ 1953년 4월 21일
전임 김강
후임 기석복
주석 김두봉
수상 김일성
장관 허정숙 문화선전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보건성 부상
임기 1953년 4월 21일 ~ 1953년 5월 2일
전임 리필규
후임 백기성
주석 김두봉
수상 김일성
장관 리병남 보건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외무성 제2대 외무장관
임기 1953년 8월 2일 ~ 1957년 9월 9일
전임 박헌영
후임 (연임)
주석 김두봉
수상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각 외무성 제3대 외무상
임기 1957년 9월 9일 ~ 1959년 10월 11일
전임 (연임)
후임 이상조
주석 김두봉
김원봉(권한대행)
최용건
수상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문화성 제3대 문화상
임기 1962년 1월 21일 ~ 1962년 4월 12일
전임 박웅걸
후임 허정숙
주석 최용건
수상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무원 내각 대외경제위원장
임기 1967년 12월 8일 ~ 1968년 11월 30일
전임 (초대)
후임 박성철
주석 최용건
수상 김일성

신상정보
출생일 1913년 6월 5일(1913-06-05)
출생지 러시아 제국 우수리스크
거주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사망일 1976년 3월 7일(1976-03-07)(62세)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인하여 비명횡사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력 대표최고전임위원 겸 당무위원
정당 조선로동당
군사 경력
복무 소련군
조선인민군 륙군
복무기간 1940년 1월 31일 ~ 1948년 8월 20일 (소련군 육군)
1948년 9월 9일 ~ 1953년 9월 9일 (조선인민군 륙군)
근무 조선인민군 지상군 총본부
최종계급 소련군 지상군 대위
조선인민군 륙군 상장
지휘 조선인민군 참모장(1948.9.9~1948.10.6)
조선인민군 총참모장(1950.8.18~1953.2.1)
조선인민군 총합참모본부 예하 지상군사령관(1953.3.14~1953.4.11)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 스탈린그라드 전투
* 베를린 공방전
한국 전쟁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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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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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일가족과 함께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그 후 만9세 시절(1922년 6월)에 일가족과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국으로 잠시 입국하여 한때 일제강점기 함경북도 경원과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대동과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강진과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양과 일제 강점기 함경북도 청진을 떠돌아다니며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아직 만12세 시절(1925년 9월)을 전후한 시기에 일가족과 함께 함경북도 청진을 떠나 출국하였으며 소비에트 우즈베키스탄에 재이주하여 아직 소련 땅이었던 우즈베키스탄에서 타슈켄트 사범대학교 인민초등교육학과를 나온 그는 소련군에 입대해 스탈린그라드 전투베를린 공방전 등 독일전에도 참전했으며 대위로까지 승진했다. 이 때 남일의 계급과 보직이 다소 차이가 있었는데 소련군 시절 최종 계급은 소련 육군 대위이면서 이 계급으로 담당한 보직이 사단 참모장 대리 직책이었다. 스탈린이 1946년 김일성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 고려인 출신 인물 중 한 명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들어왔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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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종전 후 1948년 소련군을 제대하고 평안남도 대동군 향리로 돌아갔다. 이때 소련군과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국하자 여기에 참여하여 조선인민군 참모장을 거쳤으며 한국 전쟁 때에는 조선인민군 예하 육군사령관, 그리고 전쟁 후반에는 외무상까지 맡았으며 한국전쟁 중 휴전 관련 협상 때는 항상 참여하여 외교 능력도 어느 정도 뛰어나다는 평가가 있다(1952년 이 때 당시 백선엽 장군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러나 소련파와 연안파의 반란 모의 이후 그의 능력과 출신 때문에 그를 두려워 한 김일성이 그를 숙청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밝혀진 것은 없다.[2]

1953년 당시에도 신장은 182cm이고 상당히도 굉장한 미남이라 알려진 남일은 1953년 한국휴전협정을 할 때 북측 인사들 중에서 혼자만 눈에 띄게 잘생긴 외모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직후 그는 1953년 9월 9일 조선인민군 지상군 상장 예편하였다.

최후와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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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남일의 뛰어난 능력, 엄청난 카리스마와 더불어 상당히도 굉장한 미남이라는 그야말로 외모, 능력, 인품이 모두 완벽한 남일을 질투한 김정일이 교통사고를 위장한 암살을 자행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3][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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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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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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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명(改名)하여 南一(남일)이고 마지막 개명하여 南日.
  2. “‘8월 종파사건’ 때 사라진 ‘反김일성파’ 신상기록 발굴”. 2021년 8월 28일. 2024년 5월 5일에 확인함. 
  3. “[천자칼럼] 북한의 교통사고”. 2015년 12월 30일. 2024년 5월 5일에 확인함. 
  4. 조선일보 (2020년 8월 1일). “김정일이 北 전쟁영웅 남일 죽였다”. 2024년 5월 5일에 확인함. 
전임
강건
제2대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1950년 8월 18일 ~ 1953년 2월 1일
후임
김광래
전임
강상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무성 부상
1948년 10월 16일 ~ 1950년 8월 18일
후임
강상호
전임
김회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교통성 부상
1953년 2월 1일 ~ 1953년 3월 14일
후임
김회일
전임
김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문화선전성 제1부상
1953년 4월 11일 ~ 1953년 4월 21일
후임
기석복
전임
박헌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2·3대 외무장관
1953년 8월 2일 ~ 1959년 10월 11일
후임
이상조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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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째르치즈스키, 표도르(이휘성) (2023). 〈남일: 7·27 휴전 협정에 서명한 대장〉. 《북한과 소련: 잊혀진 인물과 에피소드》. 파주: 한울아카데미. 365~379쪽. ISBN 97889460746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