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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1월 28일 (월) 21:56 (KST)
원균행장의 신뢰성에 대해
편집저는 원균행장록의 신뢰성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인용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원균행장록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당대사람이 기록한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도 많은데 굳이 후대사람이 지은 2차사료인 원균행장록을 인용할 필요가 없다.
2.행장자체가 현재의 위인전과 비슷한 성격으로 행장의 주인공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되므로 주인공의 과오는 삭제하고 공은 부풀리거나 없는 걸 지어넣는다.
3.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당시의 다른 사료들과 교차검증할시 틀린 내용이 너무 많다.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틀렸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임진년(1592) 이때 공(원균)의 수하에는 단지 배 4척이 있을 뿐이어서[1] 군사 세력의 부족으로 혼자서는 능히 적을 섬멸할 수 없음을 예측하고 우후(虞侯) 우응진(禹應辰)으로 하여금 머물러 본영(本營)을 지키게 하고, 옥포(玉浦) 만호 이운룡(李雲龍), 영등포 만호 우치적(禹致績), 남해 현감 기효근(奇孝謹) 등으로 하여금 물러가서 곤양(崑陽)을 지키도록 하고, 비장(裨將) 이영남(李英男)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에게 보내어 힘을 합해서 적을 방어하기를 청하였으나[2] 이순신이 지키는바 각기 한계가 있다 하고 듣지 아니하므로[3] 서로 의견이 5, 6차나 오고 갔다. 이때 광양 현감 어영담(魚泳潭)과 순천 부사 권준(權俊)이 이순신에게로 달려가서 바다로 나아가 싸울 것을 힘써 권고하니[4] 이순신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공은 이순신이 도착하기 전에 수차 적과 교전하여 적선 10여 척을 불사르고 빼앗으니 군성이 점차로 떨치게 되었다.[5] 5월 6일에 이르러 비로소 이순신이 전함 24척을 거느리고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더불어 거제 앞바다로 모이었고, 7일 새벽에 삼도의 수군들이 일제히 옥포 앞바다로 진격하니,[6] 진을 치고 있는 적선이 개미떼와 같이 몰려 있었다. 공이 북을 높이 올리며 곧바로 진격하여 적의 중앙을 공격하고, 이순신 등이 일시에 승세를 타고 공격하여 적을 무너뜨리니,[7] 불태워버린 적선이 1백여 척이고,[8] 불에 타서 죽은 자와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빼앗은 적선 중에서 둥근 금부채 한 자루를 얻었는데, 부채 한쪽면 가운데에 ‘6월 6일 수길(六月八日秀吉)’ 이라 쓰여 있고, 바른쪽 가에는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 라고 5자가 쓰여 있으니, 이는 필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우시축전수(羽柴筑前秀)에게 준 물길이 확실하며, 이날 목을 벤 적장은 곧 우시축전수가 틀림이 없었다.[9] 공이 적진으로 돌격을 잘하여 적은 병력으로 능히 많은 적을 격파하니, 공이 향하는 곳에는 대적할 적이 없었다.[10] 5월 8일에 선조께서 서울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니 온 군중(軍中)이 감동하였다. 공은 동생인 전(㙉)으로 하여금 행재소(行在所)에 들이게 하였고,[11] 이순신 등이 또한 승리의 장계를 올리니, 선조께서는 크게 기뻐하시고, 공에게 특별히 가선(嘉善)의 벼슬을 더하여 내리시고, 전(㙉)에게는 선전관을 제수하시었으며, 유지를 내려 격려하셨다. 5월 21일에 왜선이 당포로부터 공격하여 오므로 우리 수군이 해구로 나아가서 맞아 싸우는데, 주위의 여러 섬에서 왜적의 무리가 사면으로 일제히 나오는지라 이때에 이순신 등은 본진으로 돌아갔으므로, 공은 육지로 올라가서 우선 적의 선봉을 피하고[12] 다시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고 배들을 노량으로 옮겨 놓았다. 얼마 후 이순신이 수군을 이끌고 와서 다시 모여서 적을 곤양 근처에서 격파하고 사천 앞바다까지 적을 쫓아가서 이를 모두 섬멸해 보렸다.[13] 6월 당포에 이르니 적선이 바닷가에 나누어 정박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큰 배 한 척은 3층 누각이었고, 밖으로 붉은 장막을 드리웠는데 그 속에서 한 사람이 금관과 비단옷을 입고 적들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 보이므로 우리의 여러 장수들이 노를 재촉하여 곧바로 공격하였으며, 순천 부사 권준(權俊)이 아래로부터 치쏘아 한대의 화살로 적중시키니 금관을 쓴 자는 활촉 소리와 함께 거꾸러지고, 남은 왜적들은 놀래서 흩어지고 스스로 몸을 던져 물에 빠져 죽었다.[14] 조금 있다가 적선 40여 척이 뒤로부터 공격해 오므로 우리 군사가 노를 돌려서 이를 맞아 힘껏 싸워서 오전 10시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이르니 적들은 밤을 타고 도주해버렸다. 이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다시 와서 합세하니[15] 먼저는 여러 장수들이 적은 병력으로 적진 깊숙이 진격하는 것을 근심하다가 이억기가 도착한 것을 보고는 사기가 두 배로 되었다. 동도 앞바다까지 적을 추격하여 북을 울리며 용감하게 싸워서 적장 다섯이 함께 탄 배를 붙잡았고, 율포와 가덕 전투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전후 전투에서 공이 붙잡은 적선이 모두 55척이오, 목 벤 적이 모두 103급이었다.[16] 임금이 이 일을 들으시고 글월을 내리시어 칭찬하시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경(卿)은 나라가 허락한 간담(肝膽)이오, 세간에 다시없는 영웅호걸이라.… 당항포에서 수십 차 결전하니 참수한 적의 머리가 강을 막았고, 한산도에서는 적선 70여 척을 불태우니 고래가 머리를 바쳤도다.[17] 위급한 때을 당하여 기발(奇拔)한 계책을 냈다는 말을 옛이야기로 들었더니, 소수의 군사로써 큰 적을 무찌른 일을 오늘에 이르러서 볼 수 있었도다. 의연한 천진 절벽이요. 엄연한 일대 장상(長城)이로다. 주(周) 나라가 중흥함에 있어서는 곧 윤길보(尹吉甫)의 정벌이 있었고, 당(唐) 나라가 재건됨은 실로 곽자의(郭子儀)의 진충(盡忠)에 힘입었도다.[18]” 7월 6일에 공이 이순신 등과 또 다시 노량에 모여서 적선 63척을 불태우고,[19] 안골포 앞바다에 이르러 적선 40여 척과 마주쳐서[20] 우리 군사가 번갈아 공격하여 적의 목을 베고 빼앗은 것이 더욱 많으니, 적은 지탱하지 못하고 거제와 부산으로 도주하여 다시는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 7월 30일에 조서(詔書)가 내렸는데 이르기를, “경이 올린 네 차례의 군공장계(軍功狀啓)를 보고 그 중에서 특별히 공이 있는 자를 먼저 논상(論賞)하며 내가 기뻐하는 뜻을 보이고자 하였으나, 그때에 본직에 있던 자를 지금에 와서 승진시키려면 자리를 바꾸고 갈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으니 아직은 본직을 그대로 두고 다만 급수만을 올려 주었다가 후일에 등용하게 하라. 소록(小錄)에 기록한 왜물(倭物)은 경이 노획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뒷사람들을 권장케하라.”고 하였다.
[1] 왜적이 쳐들어오자 본인이 지레 겁을 먹고 배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는 이야기는 빠뜨리고 있다. [2] 부하들이 그렇게 하기를 청하여 마지못해 응했던 것이다. [3] 사실이 아니다. [4] 어영담과 권준이 아니라 송희립과 정운이다. [5] 전혀 사실이 아니다. 4척의 배로 10여척을 무찌른 일은 전혀 없었다. [6] 우수사 이억기는 6월 4일 당포항 싸움 후에 처음으로 합류하였다. [7] 사실이 아니다. 원균은 싸울 때 항상 이순신의 함대 뒤를 따라다니는 처지였다. [8] 제1차 출전에서 불태운 적선의 수는 42척이었다. [9] 이것은 6월 2일 당포 싸움에서 이순신의 부하 장수 이후 이몽구(李夢龜)가 왜장의 배에서 획득한 것인데 이것을 마치 원균의 공로인 것처럼 속이고 있다. [10] 그가 향하는 곳에는 항상 군사들의 인심 이탈과 패배만이 있었다. [11] 사실이 아니다. 당시 포로는 전부 이순신이 관리하였고, 적의 수급만 보냈지 포로를 행재소에 보낸 일은 전혀 없었다. [12] 왜적의 배가 쳐들어오자 그는 이번에도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다는 이야기이다. [13] 곤양 근처가 아니라 사천포에서의 전투이고, 이것은 5월 29일에 있었던 일이다. [14] 비록 엉성하게 설명하고 있으나, 이것은 당포가 아니라 6월 5일에 있었던 당항포 전투에서의 일이고 또 원균의 전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15] 이억기 함대는 이날 처음으로 참전하였다. [16] 제2차 출동 때 원균이 거느리고 참전한 전선 수는 3척에 불과했다. 이순신 함대의 거북선이 첫 출동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동안 그는 뒤에서 죽은 적의 시체를 찾아다니면서 목 베기에만 열중하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적선 55척을 붙잡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17] 그저 허허…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허무맹랑한 내용이다. [18] 중국의 史書를 읽은 것이 죄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19] 이것은 이순신의 <견내량파왜병장>에 나오는 내용으로, 불태운 것은 약 58척이고, 7월 8일의 일이다. [20] 마주친 적선은 59척이다.
위 내용을 읽어보시고 납득이 안가는 부분에 대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발 부탁드리는데
본인이 전문 역사학자이십니까? 그런 판단을 내릴만한 자격은 되십니까? 그렇게 내 생각이 옳고 나만이 옳다는 생각을 가지셨거든 본인 블로그나 카페같은데나 가서 활동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반론하시지 마시고 제발 부탁드리오니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토론이 진행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Ronain (토론) 2011년 11월 29일 (화) 00:50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