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과 양은 서로를 감싼다.[1] |
420년경 서로마제국 한 보병 부대의 방패[2] |
음과 양, 어둠과 밝음, 밤과 낮, 추위와 더위, 고요와 소리, 없음과 있음, 죽음과 삶, 시간과 공간, 등등, 가장 잘 어울리는 암놈과 수놈 한쌍을 훨씬 뛰어 넘는 누리의 (우주적) 한쌍을 하나로 아우르는 태극은 아마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는 누리 또는 우주(universe)의 가장 원초적인 본성 또는 구성 원리일 것이다. 이같은 원리는 0 과 1 곧 우주적 음양으로 이루어진 컴퓨터가 꾸며내는 가상현실에서 아마 가장 잘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우주적 작용(양)과 반작용(음)은 결코 물리적 역학적 작용과 반작용에 국한되지 않는다. 시간은 곧 우주적 작용과 반작용의 척도다. 만일 우주적 반작용 또는 저항이 없다면, 물리적 작용과 반작용 뿐만 아니라 화학 반응, 핵분열 등 모든 작용에 따르는 연쇄 반응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비롯이 곧 마침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주 공간이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고 오래오래 버텨 나가려면 우주 시간 곧 우주적 음 또는 반작용이 꼭 있어야 한다. 우주적 음은 결코 허무가 아니며 거의 어떤 차원의 우주 자체다.
- 萬物負陰而抱陽
- 만물은 음을 등지고 양을 안는다. (노자 도덕경 42장)
시각 과 착각
편집콘트라스트 효과
편집오른쪽 그림에서 색 기울기(w:color gradient)가 사실상 배경에는 있어도 그 안에 있는 띠에는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콘트라스트 효과라고 하는 이 착시 현상은 아마 뚜렷한 음과 양의 대조(contrast) 속에서 무엇을 뚜렷이 보려고 하는 우리 눈의 자동적 조건 반사일 것이다. [c 1]
만일 착각과 편견이 우리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천성이고 일상이라면, 이런 것을 착각이다 편견이다 하며 얕잡아 보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일까? 아닐 것이다! 말이 오고가고 일이 잘 풀리려면 우리의 모든 의견이 아마 이런저런 편견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만 좋자고 하면 따지고 자시고 할 것없이 무슨 짓이든 하면 된다. 그냥 그렇게 하면 될 것을 자꾸 따지고 드는 것은 그러면 조금이라도 덜 낯간지러울까 해서다.
신기루 와 무지개
편집오른쪽 그림에서 우리는 마치 도깨비 장난같은 헛것을 보게 된다. 누구든 그렇게 보는 것은 뭐가 됐든 결코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인간적 또는 동물적인 시각일 뿐이다. 신기루와 무지개도 역시 헛것이다. 이런 헛것을 보는 것도 결코 잘못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에 맞게 보는 것이다. 여기에 잘못이 있다면, 형상이 있는 곳에 해당 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섣부른 기대가 잘못이다. 또 신기루는 빛이 반드시 직진할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도 한몫 한다. 레이저 광선이 허공에 만드는 영상뿐만 아니라 컴퓨터 화면 또는 다른 어떤 매체 위의 영상도 실물이 아니다. 무릇 그림은 실물이 아니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코집스키 1933). 눈에 보이는 것(만)이 반드시 참된, 실물적 현실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보이는 것에 더러 현혹될 수도 있다.
중립 과 편향
편집칵테일 파티 효과
편집펭귄 에미는 수백 수천 마리의 펭귄 새끼들의 울음 소리 속에서 제 새끼의 울음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다. 나는 소란스러운 파티에서 내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말을 다른 말보다 더 잘 들을 수 있다. 보기의 콘트라스트 효과와 비슷한 말하자면 듣기의 콘트라스트 효과로서, 한쪽으로 치우친 선택적 듣기인 것이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만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신호를 골라서 음양이 더욱 뚜렷한 신호를 만들어낸다. 모든 신호를 중립적으로 고루고루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어려운 노릇이다.
뜻 과 말
편집어찌 보면, 뜻은 음이고 말은 양이다. 말로 때울 수 없는 뜻이 말 밖에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말은 말이고 뜻은 뜻이다. 말이 곧 뜻은 아니올시다다. 말(양)이 곧 뜻(음)은 아니라는 것은 그 동안 여러가지로 표현되었다.
사냥감 과 사냥꾼
편집정글의 사냥꾼은 사냥감의 천적이다. 사냥감들은 사냥꾼들이 없으면 얼마나 살기 좋을까 하고 바램직하다. 그러나 사냥꾼들이 탐욕스럽게 사냥감들을 모두 잡아먹어버리지는 않는 정글(법칙)이라면 아마 이런 바램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남 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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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편집편집 |
나의 편집편집 |
누리 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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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누리편집 |
우리 나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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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고리
편집의견
편집- ↑ "자동적"과 "조건적"은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어떤 조건이 주어지면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반사 작용"의 뜻이다.
- ↑ 너무도 일상적인 착시, 착각, 편견 등을 비정상적인 것 또는 잘못된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또 다른 착각일지도 모른다. 신기루가 보이는 것는 목욕탕 물속의 다리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과 다름없는 물리적 현상일 뿐, 그런 것을 잘못 본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본 것이다. 이렇게 누리가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가 속아 넘어가지 않으면 된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의 주제 또는 실체를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 착시와 편견에 대한 착각과 편견부터 똑바로 봐야 한다. 편견없이 뜻하고 말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만큼 고맙고 한편 미운 것이다.
- ↑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상업광고가 시끄러운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여기서는 침대는 가구라는 너무도 평범하고 엄연한 사실보다 침대는 과학이라는 빗댄말(은유)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려고 했던 광고다. 어른들은 빗댄말의 본뜻을 쉽게 알아차리더라도, 순진한 사람들과 어린이들과 인공지능들에게는 너무도 어려울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같은 언어 해석의 불평등 또는 격차는 언어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번진다. 언어의 기능은 과연 무엇인가? 무릇 언어의 기능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가리키는 것인가 마음을 주관적으로, 사람에 따라 흔드는 것인가? 그 대답은 너무도 자명하여 여기서 밝힐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세계는 아직도 이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은 양 ...
참고 자료
편집- ↑ 정치는 거의 어디서나 음의 보수와 양의 진보와의 맞섬이다. 이것이 맞섬인듯 서로를 감쌈이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지상낙원이 있다면 이런 것일 듯하다.
- ↑ 이것은 가장 오래된(?) 태극 그림이라고 한다. 한편, 훈족에서 보면, "423년 - 훈족 4만여 명이 로마군에 용병으로 들어가다"라고 적혀 있는데, 영어 w: Huns 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 여기엔 적잖은 의문이 있다. 아무튼 그 무렵 훈족의 어마어마한 힘은 아틸라 재위(434년–453년)의 훈족의 최전성기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 훈족이 흉노인가 고구려인인가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과연 앞선 문명의 자손인가 야만인인가다. 서양사는 거의 그들을 야만인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문명이란 과연 뭐냐, 더 약아빠진 것 아니냐? 훈족은 결코 서양사가가 제멋대로 깎아내리는 그런 어수룩한 야만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말잘타고 활잘쏘는 것뿐만 아니라 최첨단의 수레로 최첨단의 전술을 구사했다. 어쩌면 고구려와 고차(高車, 鐵勒, 또는 丁零)는 높은 (수준의) 수레 (또는 구레?)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지도, 그리고 훈족의 고향일지도 모른다.
- ↑ 함께 보기: w: Kooth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