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무기(十四無記 · Fourteen unanswerable questions)는 고타마 붓다가 대답을 거부하고 침묵한('무기 · 無記') 14가지의 질문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이다. 이 14가지의 질문은 흔히 그 성격을 무의미하다는 뜻에서 즉 열반 또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돕는 실천적인 물음이 아니라는 뜻에서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14불가기(十四不可記) 또는 14난(十四難)이라고도 한다.[1][2][3]

14무기에 대한 내용은 《중아함경 제60권 전유경(箭喻經) 제10》·잡아함경(雜阿含經) 제16권 408. 사유경(思惟經) ②》·잡아함경(雜阿含經) 제34권 962. 견경(見經)》에 들어 있다.

이 중에서 14가지 질문의 목록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경은 《잡아함경(雜阿含經) 제16권 408. 사유경(思惟經) ②》이다. 반면 관련 내용이 가장 자세한 경은 《중아함경 제60권 전유경(箭喻經) 제10》이다. 또한 이 〈전유경(箭喻經: "화살의 비유가 있는 경"이라는 뜻)〉에는 고타마 붓다의 실천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가 들어 있다. 이 경에서 고타마 붓다는 14무기에 대해서, 사성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14무기의 질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열반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때문에 자신은 항상 사성제를 가르치고 말할 뿐 14무기에 대해서는 가르치거나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14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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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신수대장경의 《잡아함경(雜阿含經) 제16권 408. 사유경(思惟經) ②》·잡아함경(雜阿含經) 제34권 962. 견경(見經)》·중아함경 제60권 전유경(箭喻經) 제10》에 기록되어 있는 14가지의 질문 또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4][5][6]

시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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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간유상(世間有常) · 세간상(世間常) · 세유상(世有常): 우주시간적으로 영원하다.
  2. 세간무상(世間無常) · 세무상(世無常) · 세무유상(世無有常):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지 않다.
  3. 세간유상무상(世間有常無常) · 상무상(常無常):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기도 하고 영원하지 않기도 하다.
  4. 세간비유상비무상(世間非有常非無常) · 비상비무상(非常非無常):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공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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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간유변(世間有邊) · 유변(有邊) · 세유저(世有底): 우주공간적으로 유한하다.
  2. 세간무변(世間無邊) · 무변(無邊) · 세무저(世無底): 우주는 공간적으로 무한하다.
  3. 세간유변무변(世間有邊無邊) · 변무변(邊無邊):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
  4. 세간비유변비무변(世間非有邊非無邊) · 비변비무변(非邊非無邊):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다.

자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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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명시신(是命是身) · 명즉시신(命即是身): 자아(命)와 육체(身)는 동일하다.
  2. 명이신이(命異身異) · 위명이신이(為命異身異): 자아(命)와 육체(身)는 별개이다.

사후세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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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래사후유(如來死後有) · 여래유사후(如來有後死) · 여래종(如來終): 여래육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한다.
  2. 여래사후무(如來死後無) · 무후사(無後死) · 여래부종(如來不終): 여래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3. 여래사후유무(如來死後有無) · 유무후사(有無後死) · 여래종부종(如來終不終): 여래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4. 여래사후비유비무(如來死後非有非無) · 비유비무후사(非有非無後死) · 여래역비종역비부종(如來亦非終亦非不終): 여래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붓다의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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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무기에 대한 《중아함경 제60권 전유경(箭喻經) 제10》에 나오는 고타마 붓다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7]

「世有常者,有生、有老、有病、有死,愁慼、啼哭、

憂苦、懊惱,如是此淳大苦陰生。如是, 世無常,世有底,世無底,命即是身,為命異身異, 如來終,如來不終,如來終不終, 如來亦非終亦非不終者,有生、有老、有病、有死, 愁慼、啼哭、憂苦、懊惱,如是此淳大苦陰生。

「世有常,我不一向說此。以何等故, 我不一向說此?此非義相應,非法相應, 非梵行本,不趣智、不趣覺、不趣涅槃, 是故我不一向說此。如是,世無常,世有底, 世無底,命即是身,為命異身異,如來終, 如來不終,如來終不終,如來亦非終亦非不終, 我不一向說此。以何等故, 我不一向說此?此非義相應,非法相應,非梵行本, 不趣智、不趣覺、不趣涅槃, 是故我不一向說此也。

何等法我一向說耶?此義我一向說,苦、苦習、苦滅、苦滅道跡,我一向說。 以何等故,我一向說此?此是義相應, 是法相應,是梵行本,趣智、趣覺、趣於涅槃, 是故我一向說此。是為不可說者則不說, 可說者則說,當如是持,當如是學。」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도 남이 있고 늙음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슬픔 · 울음 · 근심 · 괴로움 · 번민이 있으니, 이리하여 이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긴다. 이와 같이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지 않다.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하다. 우주는 공간적으로 무한하다. 자아와 육체는 동일하다. 자아와 육체는 별개이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도 남이 있고 늙음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슬픔 · 울음 · 근심 · 괴로움 · 번민이 있으니, 이리하여 이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긴다.



"세상은 시간적으로 영원하다"는 말을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다. 무슨 이유로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치(義)에 합당하지 않고 법(法)에 합당하지 않으며 또한 범행(梵行)의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지 않다.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하다. 우주는 공간적으로 무한하다. 자아와 육체는 동일하다. 자아와 육체는 별개이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등의 말을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다. 무슨 이유로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치(義)에 합당하지 않고 법(法)에 합당하지 않으며 범행(梵行)의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어떤 법을 언제나 말하는가? 나는 다음과 같은 이치(義)를 언제나 말하는데, 그 이치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苦習)과 괴로움의 소멸(苦滅)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苦滅道跡)이다(사성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을 말한다. 무슨 이유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을 말하는가? 이것들(사성제)을 말하는 것은, 이것들(사성제)은 이치(義)에 합당하고 (法)에 합당하며 범행(梵行)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고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만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고 말하여야 할 것은 말한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러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이와 같이 진정 가져야 할 것을 가지고 진정 배워야 할 것을 배워야 한다.

배경 및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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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무기는 우주와 세계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인 견해 또는 입장이 있음을 시사한다. 고타마 붓다마하가섭과의 대화에서[출처 필요] 이 두 가지 견해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 대화에서 고타마 붓다존재론(existence)의 견해비존재론(nonexistence)의 견해가 있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용어로는 존재론의 견해를 상견(常見: 영원하다는 견해), 비존재론의 견해를 단견(斷見: 단멸된다는 견해)이라고 하며, 이 두 견해를 극단적인 견해라는 의미에서 변집견(邊執見) 또는 변견(邊見)이라고 한다. 한편, 무착은 《현양성교론》에서 변집견에 대해 설명하면서 불교 경전에는 변집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고 하였다. 이 언급에 따르면, 상견은 유(有)의 견해, 단견은 무(無)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8][9]

如經說迦多衍那一切世間依止二種或有或無。

경전에서 "가다연나(迦多衍那)여, 일체의 세간[즉,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외도적인 견해]은 두 가지[의 견해]에 의지하고 있는데, 그 두 가지는 있음(有)과 없음(無)[의 견해]이다"라고 말한 바와 같다.

《현양성교론》, 제1권. 한문본 & 한글본

고타마 붓다는 사람들이 이들 두 견해로 사유하는데 익숙해져 있는데 이 두 견해에 얽매여 있는 한,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작용을 하지 않는 것에 힘을 쏟고 있는 것이므로 열반에 이르게 하는 원인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자유 또는 해탈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였다.[1]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며 공간적으로 무한하고, 자아와 육체는 별개이며, 여래는 육체의 죽음 후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명제들은 존재론의 견해이다. 반면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지 않으며 공간적으로 유한하고, 자아는 육체와 동일하며, 여래는 육체의 죽음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들은 비존재론의 견해이다. 이 두 견해들은 고타마 붓다가 활동하던 당시에, 인도의 여러 종교적 · 철학적 학파들에서 주장되었다. 존재론의 견해는 대체로 브라만교가 지닌 견해이며, 비존재론의 견해는 대체로 유물론자쾌락주의자들이 지녔던 견해였다.

고타마 붓다가 이러한 존재론비존재론의 도그마적인 그물망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을 때, 고타마 붓다는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첫째는 두 견해가 논리적인 추론을 따라 "절대적 또는 극단적으로" 발전했을 때 가져올 윤리적인 결과이며, 둘째는 "절대적 또는 극단적" 존재론과 비존재론의 견해가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절대적 존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즉 영원론자들은 자아는 항상하며 불변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자아는 성질상 불변이기 때문에 육체는 죽더라도 자아는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고타마 붓다는, 이러한 주장이 맞다면, 육체의 행위는 자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육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상관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즉, 자아가 영원하고 불변이므로 육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건 자아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유로 발전하여, 육체를 통해 비도덕적인 행위를 해도 전혀 자아에게 미치는 영향이 없다는 견해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는 인과의 법칙 또는 연기의 법칙에 의거하여 도덕적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견해와는 합치하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자아와 육체는 동일하며 자아는 육체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소멸된다는 견해를 가진 경우에도, 이러한 주장이 맞다면, 삶에서 육체의 행위를 제한해야 할 필요가 없게 되므로 육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상관 없게 될 것이라고 고타마 붓다는 말한다. 즉, 육체를 통해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 과보가 이어질 다음 생이 없으므로, 무슨 수단을 동원하건 살아있는 한 삶을 최대한 쾌락적으로 향유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극단적인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타마 붓다는 "절대적 또는 극단적" 존재론과 비존재론의 견해가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 또는 법칙인 인과의 법칙, 즉 연기의 법칙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여러 이 존재할 때는 세계가 존재하고 그 여러 이 존재하지 않으면 세계가 소멸하는데, "절대적 또는 극단적인" 상태로 존재론과 비존재론이 발전할 경우, 이러한 인과의 법칙, 즉 연기의 법칙에 어긋나는 견해를 낳게 되고 따라서 그 견해는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과는 합치하지 않게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타마 붓다는 사물들의 성질에 대해 "절대적인" 언명을 하는 것을 피했다. 고타마 붓다형이상학의 절대적 범주의 개념들은 사물들의 실제 모습과는 합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참고: 연기 · 십이인연 · 공 사상 · 나가르주나#사상)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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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양사상 > 동양의 사상 > 인도의 사상 > 불교 > 원시불교의 사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원시불교의 사상: 原始佛敎-思想 고타마에 의하면 당시의 철학자들은 결국 해결되지 않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문제로 논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확집(確執)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 결과로 생각지도 않은 죄악을 범하고 있었다. 고타마는 이와 같은 논쟁은 의의(意義)가 없는 것이라 하여 논쟁에 가담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와 세계는 상주(常住)한 것인가 혹은 무상한 것인가? 나와 세계는 유한(有限)한 것인가 혹은 무한(無限)한 것인가? 신체와 영혼(靈魂)은 하나인가 혹은 별개의 것인가? 완전한 인격자는 죽은 뒤에 생존하는가 혹은 생존하지 않는 것인가? 등의 질문이 나왔을 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14無記> 또는 <捨置記>). 왜 대답하지 않았는가 하면 이런 식의 형이상학적 문제의 논의는 무익한 것이어서 진실한 인식(認識, 正覺)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한다. 그는 하나의 입장을 고수하여 기타의 것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그는 여러 가지의 철학설이 어느 것이나 특수한 집착에 기인한 편견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이 성찰(省察)하면서 내면의 적정(寂靜)한 경지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진실한 바라문 또는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도리를 설파하는 것이라 표방하고 있었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생활해야 할 도리를 밝힌 것인데, 이 도(道)나 또는 규정을 법(다르마)이라고 불렀다. 불교의 실천적 인식이 최초로 당면한 문제는 인생의 고(苦)라는 것이었다. 인간은 어디에 있거나, 또 어떠한 것에 의지하더라도 고(苦)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고(苦)란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이 고인 것이기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모든 것이 무상(無常)한 것인 때문이다. 이 세상의 일체의 사물(事物)은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찰나(刹那)의 순간도 정지하는 일이 없다(諸行無常). 그러므로 사람은 어느 것이건 '내 물건', '나의 소유(所有)이다'라고 집착해선 안 된다. 세인(世人)이 아트만이라고 해석할지도 모르는 여하한 원리(原理) 또는 기능도 실제는 아트만이 아니다. 또한 아트만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불교에서는 실체적 혹은 기능적인 나를 상정하려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법(法, 다르마)을 인정하였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현실 존재로 하여금 현재 이와같이 존재하게 하는 규정, 규범인 것이다. 우리들의 현실 존재 속에는 수많은 법이 작용하고 있다. 거기서 우리들의 구체적인 현실 존재를 해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법체계를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들의 존재는 5온(五蘊, 五陰), 즉 5종류의 법의 영역에 있어서 유지(維持)되며 형성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5온(五蘊)이라 함은 색(色-감각적 물질적인 것 일반), 수(受-意義 중에 무엇인가 印象을 받아들이는 것), 상(想-意義 속에 像을 구성하는 일), 행(行-능동적이며 잠재적인 형성력), 식(識-대상을 각각 구별하여 인식하는 작용)이다. 우리들의 존재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종류의 법의 영역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게 이루어진 모든 것을 총괄하여 세속적 입장에서 그것을 우선 나(我), 자기(自己)라고 부르지만, 우리들의 중심주체(中心主體)는 그 어느 법의 영역 속에서도 인정할 수가 없다. 일체의 '나, 나의 것'이라고 하는 관념은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별도의 법체계로서, 예대 우리의 인식 및 행동이 성립하는 영역으로서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6입(六入)이 세워지고, 또한 그것에 대립하는 대상(對象)을 성립시키는 영역으로서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6경(六境)을 들고 있다. 세인(世人)은 물론, 일반 철학자들도 이러한 이법(理法)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하여 무엇인가 상주 영원(常住永遠)한 내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고집한다. 그로 말마임아 많은 번뇌가 생기고, 그것에 고뇌(苦腦)하게 된다. 인간의 번뇌에는 탐욕(貪慾)·노기(怒氣)·미혹(迷惑)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것은 망집(妄執=渴愛)에 기인하고 있다. 인간이 이 망집에 번뇌하고 있는 것은 결국 나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이 고(苦)·무상(無常)·비아(非我)의 이치를 깨달아 정당한 지혜를 완성하면 이 망집을 단절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인식을 얻으면 이미 그 무인가를 나(我) 혹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여 욕구(慾求)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여 진리의 인식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수행(修行)하는 데 노력하고, 계율(戒律)을 엄수하여 선정(禪定)을 닦을 필요가 있다. 그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고 망집을 단절한다면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이 해탈(解脫)의 경지이다. 그것을 불사(不死)라든가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열반이라는 말은 원래 '불어 끈다(吹消)는 것' 혹은 '불어 끈 상태(吹消狀態)'를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바람이 타는 불을 불어 끈 경우와 같이, 성하게 타오르는 번뇌의 화염(火焰)을 지혜에 의하여 불어 꺼서 고뇌가 없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거기에서는 적정(寂靜)한 최상의 안락경지(安樂境地)가 실현된다고 생각하였다. 고타마는 이상과 같은 도리를 기회 있을 때마다 제자(弟子)·신자(信者)·이교도(異敎徒:外道)들에게 설교하였는데, 설교의 강격(綱格)으로서 종합요약된 것이 <4제설(四諸說)이다. 그것은 다음네 가지 종류의 진리를 가리킨다. (1) 고제(苦諦):범부(凡夫)의 생존은 고(苦)라고 하는 진리 (2) 집제(集諦):범부의 여러 가지 고뇌는 결국 번뇌 특히 망집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하는 진리 (3) 멸제(滅諦):망집을 완전히 소멸함에 따라 고(苦)를 소멸해 버린 열반이 해탈의 이상경(理想境)이라고 하는 진리 (4) 도제(道諦):이 고(苦)를 소멸로 인도하는 수도법은 '8정도(八正道)'에 불과하다고 하는 진리 8정도(八正道:또는 八聖道)라 함은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을 이른다. 또 연기(緣起)의 교설(敎說)은 우리들의 미혹된 생존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성립되어 있는 것인가를 분명히 하고, 그와 동시에 그 근본 조건을 소멸시킴으로 해서 우리들의 미혹된 생존도 소멸할 수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원시불교 성전(聖典) 중에는 여러 가지 형식의 연기설(緣起說)이 설명되고 있으나, 어느 연기설이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로 번뇌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직시하라고 지적한다. 또한 고(苦)의 근본원인은 우리의 무명(無明) 혹은 무지(無知)에 있으므로 그 무명(無明)을 소멸시켜야만 우리들의 고(苦)도 소멸한다고 하는 논리를 공통적으로 전개하고 있다.(가장 발달된 형식의 연기설에서는 無明·行·識·名色·六入·觸·受·取·有·生·愛·老死의 12단계를 제시한다)."
  2. 곽철환 2003, "십사무기(十四無記)". 2013년 2월 24일에 확인
    "십사무기(十四無記): 붓다가 대답하지 않고 침묵한 열네 가지 무의미한 질문.
    (1) 세계는 영원한가?
    (2) 세계는 무상한가?
    (3) 세계는 영원하면서 무상한가?
    (4) 세계는 영원하지도 무상하지도 않은가?
    (5) 세계는 유한한가?
    (6) 세계는 무한한가?
    (7) 세계는 유한하면서 무한한가?
    (8) 세계는 유한하지도 무한하지도 않은가?
    (9) 여래(如來)는 사후(死後)에 존재하는가?
    (10)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11)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가?
    (12)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지도 않은가?
    (13) 목숨과 신체는 같은가?
    (14) 목숨과 신체는 다른가?
    동의어: 십사난(十四難)"
  3. 星雲, "十四無記". 2013년 2월 24일에 확인
    "十四無記:  又作十四不可記、十四難。乃十四種之不記答,為佛四記答中之捨置記答。即對於外道以顛倒之見來問難之十四種事,而佛則捨置不答。十四種,即:(一)世間常,(二)世間無常,(三)世間亦常亦無常,(四)世間非常非無常,(五)世間有邊,(六)世間無邊,(七)世間亦有邊亦無邊,(八)世間非有邊非無邊, (九)如來死後有,(十)如來死後無,(十一)如來死後亦有亦非有,(十二)如來死後非有非非有,(十三)命身一,(十四)命身異。又大智度論卷二載有十四難不答(大二五‧七四下):「世界及我常?世界及我無常?世界及我亦有常亦無常?世界及我亦非有常亦非無常?世界及我有邊?無邊?亦有邊亦無邊?亦非有邊亦非無邊?死後有神去後世?無神去後世?亦有神去亦無神去?死後亦非有神去亦非無神去後世?是身是神?身異神異?」上述乃係總舉外道由「斷常一異」等妄見生起之邪執,前十二句係針對「有無」等而發之問句,後二則針對「一異」而發。對於此類問題,佛陀一概置而不答。歸納原因,凡有三種:(一)此等之事,皆為虛妄無實之事。(二)諸法既非「有常」,亦非「斷滅」。(三)此十四無記乃鬥諍法、無益之戲論,對修行無有用處,故不予置答。〔雜阿含經卷三十四、新華嚴經卷二十一、大品般若經卷十四、北本大般涅槃經卷三十九、俱舍論卷十九、大乘義章卷六〕 p414"
  4. 잡아함경(雜阿含經) 제16권 408. 사유경(思惟經) ② Archived 2007년 10월 26일 - 웨이백 머신》, 대정신수대장경, T2 No. 99, CBETA. T02n0099_p0109a29(00) - T02n0099_p0109b04(00).
  5. 잡아함경(雜阿含經) 제34권 962. 견경(見經) Archived 2007년 10월 26일 - 웨이백 머신》, 대정신수대장경, T2 No. 99, CBETA. T02n0099_p0245c02(04) - T02n0099_p0245c06(04).
  6. 중아함경 제60권 전유경(箭喻經) 제10 Archived 2007년 10월 8일 - 웨이백 머신》, 대정신수대장경, T1 No. 26, CBETA, T01n0026_p0804a26(00) - T01n0026_p0804a29(11), T01n0026_p0805b22(02) - T01n0026_p0805b27(03).
  7. 중아함경 제60권 전유경(箭喻經) 제10 Archived 2007년 10월 8일 - 웨이백 머신》, 대정신수대장경, T1 No. 26, CBETA. T01n0026_p0805b16(02) - T01n0026_p0805c07(02).
  8. 무착 조, 현장 한역 & T.1602, 제1권. p. T31n1602_p0482a17 - T31n1602_p0482a21. 변집견(邊執見)
    "二邊執見。謂於五取蘊執計斷常染污慧為體。或是俱生或分別起能障無常無顛倒解為業。如前乃至增長邊執見為業。如經說迦多衍那一切世間依止二種或有或無。"
  9. 무착 지음, 현장 한역 & K.571, T.1602, 제1권. p. 21 / 293. 변집견(邊執見)
    "둘째는 변집견(邊執見)113)이니, 오취온에 대해서 단멸함 · 상주함을 집착하고 헤아려서 지혜를 오염시키는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혹은 선천적으로 생겨나는 것이고, 혹은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무상(無常)에 대한 뒤바뀌지 않은 이해를 장애함을 업으로 삼고, 앞에서와 같이 나아가서 변집견을 증장함을 업으로 삼는다. 경전에서 “가다연나(迦多衍那)114)여, 일체 세간은 두 가지에 의지하나니, 혹은 있음과 혹은 없음이니라”고 말한 바와 같다.
    113) 변집견(邊執見, antagrāhadṛṣṭi)은 편벽된 극단에 집착하는 견해이며 변견(邊見)이라고도 한다. 특히 자아가 사후(死後)에도 상주한다고 생각하는 상견(常見)과, 사후에는 단절된다고 생각하는 단견(斷見)에 고집하는 견해를 말한다. 62견(見) 중에서 47견을 포함한다. 이 중에서 40가지(4遍常論 · 4一分常論 · 有想 16論 · 無想 8論 · 俱非 8論)는 상견이고, 나머지 7가지는 단견이다.
    114) 성(姓)이다.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Kātyāyanī-putra, 有部의 大論師)가 아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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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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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역본
한글본
영문본
기타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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