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굉 (당나라)
조굉 또는 조횡[주 1](趙鍠, ? ~ 889년)은 당나라 말기의 군벌로, 887년부터 적수 양행밀의 손에 죽는 889년까지 관찰사로서 선흡도를 통치하였다.
생애
편집가세(家世)
편집조굉의 가세(家世)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으며, 당나라의 정사인 《구당서》와 《신당서》에도 그의 열전이 없다.[2][3] 다만 알려진 것은 그가 젊은 시절에 훗날 대군벌이 되는 주온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이다.[4][5][6][7][8][9][10]
광계 3년(887년) 5월, 당시 조굉은 선흡도의 관할 아래에 있던 지주자사로 있었다.[11][1][12][13] 같은해, 절도사 고병의 치하에 있던 규모가 더 큰 번진(藩鎭)인 회남도는 고병이 가장 총애하는 도사 여용지와 고병의 장수인 좌상도지병마사(左廂都知兵馬使) 필사탁 간의 내전에 휩싸여 있었다.[11][1] 필사탁은 회남도의 군부 양주 광릉을 포위하였으나,[11][1][14][15] 신속하게 함락시킬 수가 없어 선흡도관찰사 진언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정하고 그들이 합세하여 승리한다면 회남절도사의 직책과 권한을 진언에게 넘기기로 약속하였다.[11][1][16][15] 그러나 진언의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필사탁은 이미 양주를 함락시켰다.[11][1][17][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탁은 예전에 약속한 대로 절도사의 권한과 직책을 진언에게 넘겼다.[11][1][19][20] 진언은 직무를 이행하러 광릉으로 떠나면서, 지주자사 조굉을 선흡도관찰사에 보직시켜[11][1][12][21] 선흡도의 군부 선주를 그에게 맡기고[22][23][24] 자신을 대신하도록 하였다.[11][1][21]
그러나 그 직후에 진언과 필사탁은 여주자사 양행밀과 여용지의 연합군에게 패하였다.[11][1] 그들은 양주를 탈출하여[11][1][25][26] 손유와 합세하였으나,[11][1][27][28] 후에 손유에게 주살되면서[11][1][29][30] 조굉은 북쪽의 동맹세력이 없어진 상태로 남게 되었다.[22] 문덕 원년(888년), 손유는 양행밀을 무찌르고 양행밀로 하여금 도로 여주로 도망가게 하였다.[22][11][1][31][32] 같은해 8월, 손유가 여주로 쳐들어와 자신을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하던 양행밀은 진남군(鎭南軍, 본부는 지금의 강서성 남창시에 있었다)절도사 종전을 공격하여 진남군을 접수하려고 하였다.[22][11][1][33][34] 하지만 양행밀의 모사 원습(袁襲)은 오히려 그를 설득하여 조굉이 도모하기 제일 쉬운 대상이라고 하였다.[22][11][1][33][34] 원습은 그 이유로 다음과 같은 점들을 들었다.[11][1][33][34]
원습은 나아가 양행밀에게 화주자사 손단(孫端)과 상원(上元, 지금의 강소성 남경시 강녕구)을 통치하던 장웅을 설득하여 조굉을 먼저 공격한 다음, 조굉이 손단과 장웅을 물리치는 데 전념하는 때를 틈타 진격하자고 제안하였고, 양행밀은 이에 동의하였다.[6][11][1][33][34]
양행밀은 손단과 장웅을 설득하여 조굉을 공격하였고, 조굉은 처음에 그들의 공격을 물리쳤다.[4][6][11][1][33][34] 이 틈을 탄 양행밀은 장수 장훈(張訓)[35]과 안인의(安仁義)[36]를 파견하여 조굉의 장수 소당(蘇塘)[주 2]과 칠랑(漆朗)이 2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갈산(曷山, 지금의 안휘성 선성시 선주구 서남쪽에 있는 산[37])에 주둔해 있던 것을 공격하여 그들을 대패시키고[6][11][1][33][34] 선흡도의 군부인 선주로 진격하여 그곳을 포위하였다.[4][22][11][1][38][39] 당시 지주자사였던 조굉의 형 조건지(趙乾之)가 지주에서 군대를 이끌고 조굉을 구원하러 선주로 오려고 하던 것을 양행밀의 부장 도아(陶雅)가 구화산에서 요격하여 무찌르니 조건지는 진남군으로 달아났고, 조굉은 고립무원이 되었다.[11][1][40][41] 곡계(曲溪, 지금의 강소성 회안시 우이현 서남)의 장수 유금(劉金)은 양행밀군을 따라 능양(陵陽, 지금의 안휘성 지주시 청양현 능양진(陵陽鎭))에서 조굉을 공격하였다.[42]
패망
편집용기 원년(889년) 6월, 선주성을 포위한 지 10개월차에 접어든 양행밀군 내부에서는 매양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다.[43] 그러다가 다른 군벌 무주자사 위전풍이 양행밀군 측에 군량과 급료를 수시로 대어 주면서 양행밀군은 오래 버틸 수 있었다.[43] 이 무렵에 접어들면서[43] 선주성에서는 식량이 바닥나[4][7][8][43][44]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7][8][43][44] 일이 이렇게 되자, 조굉의 대다수 심복 장수들까지 성을 나와 양행밀군에 투항하였다.[4][45] 이보다 앞서, 조굉은 무예와 용맹이 뛰어난 군사들을 뽑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간(李簡)을 휘하에 심복으로 둔 적이 있었는데,[45] 이간은 조굉의 수문장을 속이고 양행밀에게로 달아났다.[45] 한편, 조굉이 반드시 도망칠 것이라고 예상한 유금은 계략을 써서 그를 사로잡으려고 하였다.[4][42]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조굉을 속였다.[4][42]
“ | 장군께서 나오신다면, 저의 군영을 오고 가실 수 있습니다.[4][42] | ” |
기뻐한 조굉은 그에게 많은 금을 주고 밤중에 유금을 자신의 침실로 맞아들여 그가 딸에게 장가를 드는 것을 허락하였다.[4][42] 군영으로 돌아온 유금은 조굉의 군사들이 많아 일단 성을 나가면 제압하기 어려워질까 봐 염려하였다.[42] 그리하여 다음날 사람을 성 앞으로 보내어 큰 소리로 외치며 말하였다.[4][42]
“ | 유랑(劉郞, 유금)은 너와 사위가 될 수 없다![4][42] | ” |
이 말을 들은 조굉은 낙담하였다.[42] 밤중에[46][42][47] 조굉의 장수인 지휘사(持揮使) 주진사(周進思)가 성을 점거하고 조굉을 내쫓았다.[7][8][43][10] 조굉은 손유에게 합류하고자 광릉으로 달아났다.[7][8][43][10] 그는 배를 타고 동쪽 계곡으로 나와 폭포를 타고 도망쳤는데, 양행밀군이 모두 보병과 기병이라 물살에 막히면 따라잡을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여기고, 영양(永陽, 지금의 안휘성 선성시 선주구 수양진(水陽鎭))에 머물러 갑옷을 벗고 계곡 언덕으로 올라갔다.[46][47] 그러나 조굉이 도망칠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대비를 해 두고 있었던 양행밀의 대장 전군은 비밀리에 가볍고 빠른 작은 배를 만들어 조굉을 따라잡았고, 놀란 조굉은 도망칠 겨를도 없이 전군에게 사로잡혀[46][47][7][8][43][44] 양행밀에게 바쳐졌다.[47]
조굉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무주자사 위전풍은 상술하였듯이 양행밀이 보낸 사절에게 답례하여 우호 관계를 맺고 여러 차례 양행밀에게 군량과 급료, 무기 등을 대어 주었고,[48] 양행밀의 처남 주연수도 많은 공을 세웠으며,[46] 금우진장(金牛鎭將, 지금의 안휘성 합비시 여강현 서북에 있던 기지부대장) 대몽(臺濛)은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고,[49] 마군부지휘사(馬軍副指揮使) 이우(李遇)[50]와 유존(劉存)[51]·장숭(張崇)[52]·왕관(王綰)[53] 및 오장(伍長) 서온[54][주 3] 등도 각각 공을 세웠다. 훗날 위전풍은 양행밀 세력의 계승자인 양융연에게 사로잡혔다가, 예전에 양행밀과 한 적이 있었던 이번 합작으로 석방되었다.[48]
조굉의 주위에 있던 측근들은 모두 흩어져 가 버렸는데, 급사(給使) 이덕성과 한구(韓球)만이 조굉의 곁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55][7][8][9][44] 조굉은 이덕성을 보내어 선주성으로 들어가서 주진사를 설득하게 하였는데, 이덕성이 출발하려고 할 때 갑자기 급병에 걸려 갈 수 없게 되었다.[55] 그리하여 다시 한구에게 명하였으나, 한구는 주진사에게 갔다가 참수되어 머리가 성 밖으로 던져졌다.[55] 그날 이덕성은 바로 병이 나았다.[55] 후에 성 안에서 다른 선주 장수들이 주진사를 체포하여 양행밀에게 선주를 바치고 항복하였다.[7][8][9][44] 조굉의 장수 주본은 조굉의 군대 안에서 용맹이 가장 뛰어나기로 이름난 인물이었는데, 조굉이 전쟁에서 패망하자 주본은 양행밀에게 사로잡혔다가 석방되었고, 이때부터 양행밀의 휘하에서 복무하게 되었다.[55][7][8][56][44]
한편, 조굉을 생포한 양행밀은 조굉으로 하여금 자신의 동생과 같이 살게 하였다.[5] 이때, 당시 선무군(宣武軍, 본부는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에 있었다)절도사이자 당나라에서 가장 권세 있는 군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주온이 양행밀에게 사자를 보내어 조굉을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해 왔다.[4][5][6][7][8][9][10] 양행밀은 원습과 이 일을 상의하였고, 원습은 조굉을 참수하고 그의 머리를 주온이 있는 선무군의 군부 변주로 보내자고 제안하였다.[4][5][6][7][8][9][10] 양행밀은 그대로 하였다.[57][4][6][7][8][9][10][주 4]
각주
편집내용주
편집- ↑ 호삼성에 따르면, 鍠은 각각 戶와 盲의 반절(호+(맹←욍)=횡[당시 본음(本音)]→굉[현 속음])[鍠, 戶盲翻.], 戶와 觥의 반절(호+굉=횡[당시 본음]→굉[현 속음])[鍠, 戶觥翻.]이라고 하였다.[1]
- ↑ 《신당서》 권188의 양행밀의 열전에서는 소당의 이름자가 瑭으로 기록되어 있다.[4] 또한, 같은 열전에서는 선흡도군의 장수 소당이 20,000명의 병력으로 맞서 주둔해 있었는데, 양행밀이 나가 싸우지 않고 기습부대를 나누어 보내 나무를 베고 사방으로 나가는 길을 개척하자, 소당이 놀라 달아났다고 하였다.[4]
- ↑ 이후 서온은 양행밀이 선주성에 입성할 때 다른 여러 장수들이 앞다투어 금과 비단을 약탈하고 전리품들을 차지하느라 여념이 없는 가운데 혼자서 식량창고를 접수하고 죽을 끓여 굶주림에 시달리던 선주 백성들에게 먹여 그들을 구휼하는 행보를 보여 주었다.[7][8][43][44] 이것이 정사에서 최초로 언급된 서온의 첫 행적이었다.
- ↑ 《오월비사(吳越備史)》에는 양행밀이 조굉을 죽인 시기가 문덕 원년(888년) 11월의 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58]
참조주
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너 더 러 머 버 서 어 저 처 호삼성, 《자치통감음주》, 권257 당기(唐紀) 제73 희종 혜성공정효황제(惠聖恭定孝皇帝, 이하 《자치통감음주》·《자치통감보》는 희종) 하-하
- ↑ 유후·조영 외, 《구당서》, 목차
- ↑ 구양수 외, 《신당서》, 목차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너 구양수 외, 《신당서》, 권188 열전 제113 양·주·시·손(楊朱時孫)
- ↑ 가 나 다 라 노진(路振), 《구국지(九國志)》, 권1 오 中 원습, 월아당총서(粵雅堂叢書) 제10집 《구국지》, 9/133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오임신(吳任臣), 《십국춘추》, 권5 오5 열전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사마광, 《자치통감》, 권258 당기(唐紀) 제74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호삼성, 《자치통감음주》, 권258 당기(唐紀) 제74 소종 성목경문효황제(聖穆景文孝皇帝, 이하 《자치통감음주》·《자치통감보》는 희종) 상-상
- ↑ 가 나 다 라 마 바 엄연(嚴衍), 《자치통감보(資治通鑑補)》, 권257 당기(唐紀) 제74 소종 상-상 中 용기 원년(888, 기유), 사보루(思補樓) 교정인쇄본 《자치통감보》(136), 8/105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바 《백양판 자치통감 (63) 군벌혼전》, 5쪽. [889년 (기유)].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너 더 러 머 버 서 어 저 사마광, 《자치통감》, 권257 당기(唐紀) 제73
- ↑ 가 나 엄연(嚴衍), 《자치통감보(資治通鑑補)》, 권257 당기(唐紀) 희종 하-하 中 광계 3년(887, 정미), 사보루(思補樓) 교정인쇄본 《자치통감보》(135), 63/97페이지.
- ↑ 《백양판 자치통감 (63) 군벌혼전》, 178–179쪽. 부록[당 왕조 절도사 (중)].
- ↑ 엄연(嚴衍), 《자치통감보(資治通鑑補)》, 권257 당기(唐紀) 희종 하-하 中 광계 3년(887, 정미), 사보루(思補樓) 교정인쇄본 《자치통감보》(135), 54-55/97페이지.
- ↑ 가 나 《백양판 자치통감 (62) 낭호곡》, 116쪽. [887년 (정미)].
- ↑ 엄연(嚴衍), 《자치통감보(資治通鑑補)》, 권257 당기(唐紀) 희종 희종 하-하 中 광계 3년(887, 정미), 사보루(思補樓) 교정인쇄본 《자치통감보》(135), 55/97페이지.
- ↑ 엄연(嚴衍), 《자치통감보(資治通鑑補)》, 권257 당기(唐紀) 희종 하-하 中 광계 3년(887, 정미), 사보루(思補樓) 교정인쇄본 《자치통감보》(135), 57/97페이지.
- ↑ 《백양판 자치통감 (62) 낭호곡》, 117-118쪽. [887년 (정미)].
- ↑ 엄연(嚴衍), 《자치통감보(資治通鑑補)》, 권257 당기(唐紀) 희종 하-하 中 광계 3년(887, 정미), 사보루(思補樓) 교정인쇄본 《자치통감보》(135), 58/97페이지.
- ↑ 《백양판 자치통감 (62) 낭호곡》, 119쪽. [887년 (정미)].
- ↑ 가 나 《백양판 자치통감 (62) 낭호곡》, 123쪽. [887년 (정미)].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구양수, 《신오대사》, 권61 세가(世家) 제1 오(吳)세가
- ↑ 유후·조영 외, 《구당서》, 권182 열전 제132
- ↑ 구양수 외, 《신당서》, 권224하 열전 제149하 반신(叛臣) 下
- ↑ 엄연(嚴衍), 《자치통감보(資治通鑑補)》, 권257 당기(唐紀) 제73 희종 하-하 中 광계 3년(887, 정미), 사보루(思補樓) 교정인쇄본 《자치통감보》(135), 72-73/97페이지.
- ↑ 《백양판 자치통감 (62) 낭호곡》, 132쪽. [887년 (정미)].
- ↑ 엄연(嚴衍), 《자치통감보(資治通鑑補)》, 권257 당기(唐紀) 제73 희종 하-하 中 광계 3년(887, 정미), 사보루(思補樓) 교정인쇄본 《자치통감보》(135), 73-74/97페이지.
- ↑ 《백양판 자치통감 (62) 낭호곡》, 133쪽. [887년 (정미)].
- ↑ 엄연(嚴衍), 《자치통감보(資治通鑑補)》, 권257 당기(唐紀) 제73 희종 하-하 中 광계 4년(888, 무신), 사보루(思補樓) 교정인쇄본 《자치통감보》(135), 82-83/97페이지.
- ↑ 《백양판 자치통감 (62) 낭호곡》, 141쪽. [888년 (무신)].
- ↑ 엄연(嚴衍), 《자치통감보(資治通鑑補)》, 권257 당기(唐紀) 제73 희종 하-하 中 문덕 원년(888, 무신), 사보루(思補樓) 교정인쇄본 《자치통감보》(135), 88/97페이지.
- ↑ 《백양판 자치통감 (62) 낭호곡》, 148쪽. [888년 (무신)].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엄연(嚴衍), 《자치통감보(資治通鑑補)》, 권257 당기(唐紀) 제73 희종 하-하 中 문덕 원년(888, 무신), 사보루(思補樓) 교정인쇄본 《자치통감보》(135), 93/97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백양판 자치통감 (62) 낭호곡》, 154쪽. [888년 (무신)].
- ↑ 노진(路振), 《구국지(九國志)》, 권1 오 中 장훈, 월아당총서(粵雅堂叢書) 제10집 《구국지》, 24/133페이지.
- ↑ 노진(路振), 《구국지(九國志)》, 권3 오 中 안인의, 월아당총서(粵雅堂叢書) 제10집 《구국지》, 120/133페이지.
- ↑ 《백양판 자치통감 (62) 낭호곡》, 154-155쪽. [888년 (무신)].
- ↑ 엄연(嚴衍), 《자치통감보(資治通鑑補)》, 권257 당기(唐紀) 제73 희종 하-하 中 문덕 원년(888, 무신), 사보루(思補樓) 교정인쇄본 《자치통감보》(135), 93-94/97페이지.
- ↑ 《백양판 자치통감 (62) 낭호곡》, 154-156쪽. [888년 (무신)].
- ↑ 엄연(嚴衍), 《자치통감보(資治通鑑補)》, 권257 당기(唐紀) 제73 희종 하-하 中 문덕 원년(888, 무신), 사보루(思補樓) 교정인쇄본 《자치통감보》(135), 94/97페이지.
- ↑ 《백양판 자치통감 (62) 낭호곡》, 156쪽. [888년 (무신)].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노진(路振), 《구국지(九國志)》, 권1 오 中 유금, 월아당총서(粵雅堂叢書) 제10집 《구국지》, 28-29/133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엄연(嚴衍), 《자치통감보(資治通鑑補)》, 권257 당기(唐紀) 제74 소종 상-상 中 용기 원년(888, 기유), 사보루(思補樓) 교정인쇄본 《자치통감보》(136), 7/105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백양판 자치통감 (63) 군벌혼전》, 4쪽. [889년 (기유)].
- ↑ 가 나 다 노진(路振), 《구국지(九國志)》, 권1 오 中 이간, 월아당총서(粵雅堂叢書) 제10집 《구국지》, 38-39/133페이지.
- ↑ 가 나 다 라 구양수 외, 《신당서》, 권189 열전 제114 고·조·전·주(高趙田朱)
- ↑ 가 나 다 라 노진(路振), 《구국지(九國志)》, 권3 오 中 전군, 월아당총서(粵雅堂叢書) 제10집 《구국지》, 114/133페이지.
- ↑ 가 나 노진(路振), 《구국지(九國志)》, 권2 오 中 위전풍, 월아당총서(粵雅堂叢書) 제10집 《구국지》, 76/133페이지.
- ↑ 노진(路振), 《구국지(九國志)》, 권1 오 中 대몽, 월아당총서(粵雅堂叢書) 제10집 《구국지》, 21/133페이지.
- ↑ 노진(路振), 《구국지(九國志)》, 권1 오 中 이우, 월아당총서(粵雅堂叢書) 제10집 《구국지》, 27/133페이지.
- ↑ 노진(路振), 《구국지(九國志)》, 권1 오 中 유존, 월아당총서(粵雅堂叢書) 제10집 《구국지》, 36/133페이지.
- ↑ 노진(路振), 《구국지(九國志)》, 권1 오 中 장숭, 월아당총서(粵雅堂叢書) 제10집 《구국지》, 52-53/133페이지.
- ↑ 노진(路振), 《구국지(九國志)》, 권1 오 中 왕관, 월아당총서(粵雅堂叢書) 제10집 《구국지》, 55/133페이지.
- ↑ 노진(路振), 《구국지(九國志)》, 권3 오 中 서온, 월아당총서(粵雅堂叢書) 제10집 《구국지》, 125-126/133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오임신(吳任臣), 《십국춘추》, 권7 오7 열전
- ↑ 엄연(嚴衍), 《자치통감보(資治通鑑補)》, 권257 당기(唐紀) 제74 소종 상-상 中 용기 원년(888, 기유), 사보루(思補樓) 교정인쇄본 《자치통감보》(136), 6-7/105페이지.
- ↑ 구양수 외, 《신당서》, 권10 본기 제10 中 소종
- ↑ 범경(范坰)·임우(林禹), 《오월비사(吳越備史)》, 권1 무숙왕(武肅王) 上
참고 문헌
편집전임 진언 |
선흡도관찰사 887년 ~ 889년 |
후임 양행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