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인(趙永仁, 1133년 ~ 1202년)은 고려 중기문신이다. 본관은 횡천(橫川), 초명은 조영심(趙永心)[1]이다. 조충(趙冲)의 아버지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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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부터 출중하여, 박학다식했으며 글을 잘 지었다.[2]

1160년(의종 14) 과거에 급제[3]하여 전주서기(全州書記)로 나가서는 선정으로 이름이 났으며, 명종이 즉위하자 조영인을 시켜 태자[4]를 돌보게 했다.[2]

1174년(명종 4)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금나라에 가서 신년을 하례하고 돌아왔으며[5], 그 후 여러 차례 승진해 1185년(명종 15) 우승선(右承宣)으로서 국자시(國子試)를 주관해 최문목(崔文牧), 정광우(丁光祐) 등을 선발했다.[6]

1190년(명종 20)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로 승진해 재추의 반열에 들어갔으며[5], 이듬해 참지정사(叅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다가, 1194년(명종 24) 수태위(守太尉)·상주국(上柱國)이 더해졌다.[2]

1196년(명종 26)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를 겸직했다가[5], 이듬해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수태사(守太師)·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로 승진했다.

1198년(신종 원년) 금나라 사신이 와서 명종이 왕위를 물려준 일[7]에 대해 따지면서 “이 조서는 반드시 전 왕에게 직접 전달하라는 황제의 분부가 계셨소.”라고 하였다.

조정 신하들이 모두 난감해하자 조영인이 금나라 사신에게 이렇게 거짓말했다.

전 왕께서 지금 남쪽 지방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어서 오가는 여정을 계산해 보면 30일쯤 걸립니다. 꼭 직접 전달하려거든 몇 개월 머물러 주실 것을 청합니다.

이에 금나라 사신이 “정말 그렇다면 전 왕에게 꼭 직접 전달할 필요는 없소.”라며 이튿날 신종에게 조서를 전해 주었다.

이 해 눈이 침침하므로 퇴직을 요청하니, 왕이 그를 문하시중(門下侍中)·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감수국사(監修國史)·상주국(上柱國)·판이부사·태자태사(太子太師)로 올려 주고 사직을 허락했다.

1202년(신종 5년) 70세로 졸하니 왕이 크게 애도하며 문경(文景)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뒷날 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2]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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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는 조영인에 대해 그의 열전에서 이렇게 평했다.

여러 차례 승진해 승선(承宣)이 되어서는 왕 잘못을 바로 잡은 일이 많아 당시 여론이 그를 높이 평가했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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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조 - 조주조(趙周祚)[8] : 중상승(中尙丞)
    • 조부 - 조정신(趙正臣)[8] : 합문지후(閤門祗候)
      • 아버지 - 조시언(趙時彦)[8] : 증(贈) 사공(司空)·좌복야(左僕射)
      • 어머니 -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수국사(修國史), 정경공(貞敬公) 문공원(文公元, 1084년 ~ 1156년)의 3녀[1]
        • 매형 - 류영재(柳英材, ? ~ 1170년)[8] : 합문지후, 증 좌복야 또는 우복야(右僕射)
        • 전처 - 참지정사(參知政事)·병부상서(兵部尙書) 홍지유(洪至柔)의 딸[3]
        • 후처 - 직사관(直史館) 윤자고(尹子固)의 딸[9][10]
          • 장남 - 조준(趙準)[2] : 좌승선(左承宣)
          • 차남 - 조충(趙冲, 1171년 ~ 1220년)[2] : 수태위(守太尉)·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수국사·판병부사(判兵部事), 증 문하시중(門下侍中), 문정공(文正公)

조영인이 등장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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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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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공원 묘지명』
  2. 『고려사 조영인전』
  3. 『고려열조등과록』
  4. 훗날의 강종
  5. 『고려사 명종세가』
  6. 『고려사 선거지』
  7. 명종은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폐위되었다.
  8. 『류영재 처 조씨 묘지명』
  9. 『조충 묘지명』
  10. 『조충 묘지명』에 의하면 조충은 어머니가 윤씨(尹氏)임이 확실하나, 형 조준은 어머니가 누구인지 불명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