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쿠인 에카쿠
하쿠인 에카쿠(白隠慧鶴, 1685년 ~ 1768년)는 일본 에도시대의 선사(禪師)로, 일본 임제종의 승려이다. 화가이자, 시인이자, 조각가이기도 했다. 달마도를 많이 그려 일본의 달마라고도 불렸다.[1] 오른쪽에 있는 그림도 백은선사의 자화상이다.
하쿠인 에카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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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85년 1월 19일 도카이도(東海道:동해) 하라(原:원), 현재의 시즈오카현(静岡県) 누마즈시(沼津市) |
입적 | 1768년 1월 18일 출생지와 동일 |
속명 | 이와지로(岩次郎) |
법명의 뜻
편집법명인 하쿠인 에카쿠(白隠慧鶴 : 백은혜학)은 직역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흰 백(白), 숨을 은(隠), 지혜 혜(慧), 학 학(鶴)으로, '흰 곳에 숨어있는 지혜로운 학'이란 뜻이다. 하얀 후지산에 은거했다고 백은이라 한 것이다.[2]
백은선사의 고향은 후지산 인근인, 현재의 시즈오카현 누마즈시이다.[2]
생애
편집어린 시절
편집에도시대 후지산 인근 시즈오카현(静岡県)의 하라쥬쿠(현재의 누마즈 시)에서 부유한 역장(驛長)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이와지로(岩次郎)였다.[2]
어머니가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어 어린 백은선사를 절에 데리고 다녔다. 백은선사는 절에서 법문을 듣고 와서는 하인들에게 이야기를 해줄 정도로 영특했다.[2]
출가를 하다
편집11살 때,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에 개구리를 죽였던 사실때문에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관음경"과 "대비경"을 외우기 시작했고, 출가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2]
15살 때, 반대하던 부모를 설득하여 고향마을에 있는 송음사(松蔭寺, 쇼인지)로 출가한다.[2]
출가의 후회 다시 재발심
편집출가를 하여 수행하던 중에 어느 높은 스님이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백은선사는 불법이 높은 스님도 비참하게 죽는 다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
이후 시, 글, 그림에 빠져 지냈다. 그러다 선관책진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졸음을 쫓기 위해 자신의 살을 송곳으로 찌르며 수행한 이야기를 읽게 된다. 다시 발심하여 선수행의 길로 들어선다.[2]
큰 깨달음을 얻다
편집23세에 고향의 절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후지산이 분화하여 절의 모든 승려가 달아났지만, 백은선사는 수행을 계속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정수노인 밑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2]
입적하다
편집3일 전에 입적을 예언하고는, 84살에 입적을 하였다.[3]
일화
편집척수성음(隻手聲音) : 한 손으로 소리를 내다
편집백은선사는 스승 없이 선관책진이라는 책을 스승삼아 토굴에서 선수행을 했다. 그래서 이를 인가해 줄 스승이 없었다. 토굴 앞에 흐르는 시냇가에 가서 내가 바로 깨우쳤으면 시냇물이 거꾸로 흘러 가라고 했는데, 시냇물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에 깨달았다는 자신감을 얻고 종횡무진으로 설법을 하고 다녔다.[4]
그러다 어떤 거사(남자 불교 신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거사는 백은선사에게 정말 깨우쳤으면, 한 손만으로 소리를 내보라고 했다. 말문이 막힌 백은선사를 이후 입을 닫고 다시 선수행에 들어갔다.[5]
시간이 꽤 흘렀고, 어느 비가 오는 날에 백은 선사는 아궁이에서 불을 쬐고 있었다. 그런데 아궁이가 좁아 몸의 반이 처마 밖으로 나가 있었다. 백은 선사의 몸은 반은 말라있었지만, 반은 젖어버렸다. 여기서 백은선사는 크게 깨우쳤다. 나와 다른 것을 구분하던 울타리가 무너지자, 세상의 모든 소리가 나의 소리가 된 것이다.[5]
정수노인이 코를 비틀다
편집당시 일본 임제종의 정맥으로 불리던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는 선사의 제자 중에 도쿄에단(道鏡慧端)이라는 선사가 있었는데, 일명 정수노인(正受老人)이라고 불렸다.[6]
백은선사는 정수노인을 찾아가서 깨달음을 인가받기 위해 게송을 써서 올렸다. 그러나 정수노인은 백은선사의 게송은 읽지도 않고, 이런 종이는 필요없으니 깨달은 바를 몸으로 내놔라고 하였다.[6]
백은선사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시시한 것이 있다면 토해버리겠다면서, 토하는 시늉까지 하였다. 정수노인은 더욱 날카롭게 조주의 무(無)는 어떻게 보았냐고 다시 물었다. 백은선사는 무(無)는 무(無)인데, 어디 보거나 손댈 수가 있냐고 답했다.[6]
갑자기 정수노인이 백은선사의 코를 잡아서 비틀더니, 보거나 손댈 수 없는데 내가 어떻게 너의 코를 잡아서 비트냐고 반문했다. 백은선사는 말문이 막혔다. 정수노인은 남천화상은 천화하여 어디로 갔냐고 다시 물었다.[6]
백은선사는 양손으로 귀를 막고, 밖으로 도망쳤다. 정수노인은 백은선사에게 귀신 굴 속에 처박힌 엉터리라고 소리쳤다. 백은선사를 자신의 깨달음이 엉터리 였음을 알고, 정수노인 아래서 다시 화두수행을 시작하였다.[6]
어느 날, 백은선사는 탁발을 나가서 어느 집 처마에 섰다. 집주인에 비켜달라고 3번을 말했으나, 이미 화두에 깊이 빠져서 알지를 못했다. 집주인이 대나무로 백은선사의 머리를 치자, 백은선사를 그대로 기절했다. 백은선사는 깨어나서 집주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6]
백은선사는 돌아가서 정수노인에게 절을 올렸다. 정수노인이 기뻐하며 말했다. "음. 됐구나 됐어."[6]
처녀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가 되다
편집백은선사가 있는 후지산 아래에 마을이 있었다. 어떤 처녀가 동네 총각과 사랑을 해서 임신을 하였다. 처녀는 아버지에게 아이의 아버지가 백은선사라고 했다. 명성이 높은 백은선사의 아이라고 하면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7]
하지만 처녀의 예상과 다르게 마을사람들은 백은선사를 찾아가 욕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백은선사는 "그렇습니까?"라고만 말했다. 같은 절의 스님들도 수근거리며 절을 떠나기 시작했다.[7]
10개월이 흘러 처녀의 부모가 아이를 가져다 주며 길러라고 했다. 백은선사는 또 다시 "그렇습니까?"라고만 말했다. 이제는 남아 있던 스님들 마저도 절을 떠났고 신도들도 없어졌다.[7]
백은선사는 젖동냥과 탁발을 하며 아이를 정성껏 길렀다. 한편 처녀는 아이를 잊지 못해, 사람들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다. 놀란 아버지와 마을사람들은 백은선사를 찾아가서 용서를 빌었다.[7]
백은선사는 역시나 "그렇습니까?"라고만 하고 아이를 다시 처녀에게 돌려주었다.[7]
사무라이를 모욕하다
편집오다 시게노부라는 사무라이가 백은선사를 찾아와서는 극락과 지옥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달라고 했다. 백은선사는 그에게 무엇을 하는 지를 물었다.[8]
시게노부는 이름 있는 무사라고 했다. 그러자 백은선사는 무사면 전장에나 나갈 일이지, 극락이나 지옥을 왜 찾아다니냐고 하면서 못난 무사녀석이라고 모욕했다. 시게노부는 지금 사과하지 않으면 한 칼에 베겠다고 했다. 그래도 백은선사는 역시 보잘 것 없는 겁쟁이 무사라고 다시 모욕했다.[8]
화가 난 시게노부가 칼로 목을 치려고 하자, 백은선사가 바로 그곳이 지옥이라고 말했다. 순간, 시게노부는 무릎을 꿇으며, 노여움으로 인생을 망칠 뻔 했다며 지옥이 있는 곳을 알았다고 감사하다고 했다. 백은선사는 웃으며 시게노부의 어깨를 두드리며, 지금은 극락의 입구에 서있다고 말했다.[8]
입적을 예언하다
편집어느 날, 의원이 백은선사의 맥을 짚고는 이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백은선사는 크게 웃으며, 3일 후 죽음을 예견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명의는 아니라고 하였다.[9]
백은선사는 3일 후에 제자들에게 뒷일을 맡겼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잠에서 깨면서 "음"이라고 큰 소리를 내며 84살의 나이로 입적했다고 한다.[9]
제자인 비구니의 눈물
편집백은선사의 제자 중에 비구나(여자 승려)가 있었다. 이 비구니도 깨달았기에,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비구니가 딸이 죽자 크게 소리를 내어 울었다. 주위 사람들은 큰스님(백은선사) 밑에서 수행하여 인가를 받은 사람이 감정을 다스리지도 못한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비구니는 계속 눈물을 쏟았다.[10]
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에는 빠지는 않는 진실된 자유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10]
열반송
편집승려가 입적할 때, 짓는 시를 우리는 열반송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지세이(Jisei)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죽음의 시(Death Poem)"이다.
백은선사의 열반송은 다음과 같다.
若い衆や死ぬがいやなら今死にや
젊은 이들이여. 죽기 싫다면 지금 죽어라.一たび死ねばもう死なぬぞや
한 번 죽으면, 다시 죽지 않으리니.
진짜 죽으라는 말은 아니고, 깨달음으로 생사를 끊어라는 이야기이다.
백은선사의 그림
편집-
백은선사가 그린 달마도.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면, 본성을 보게 되어 성불할 것이다.(直指人心,見性成佛)"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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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에 소장된 백은선사의 달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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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선사가 1764년에 그린 80세의 자화상. 일본 도쿄 에이세이 문고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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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선사가 그린 그림. 육조 혜능대사가 오조대사 밑에서 8개월 동안 찧던 쌀절구.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불교신문, 불교신문 (1997년 2월 18일). “(선화를 찾아서-6) 일본 하쿠인 에가쿠의 달마도”.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9월 12일에 확인함.
백은혜학(1685-1768)의 호는 沙羅樹下老人, 江戶시대의 선승으로 일본임제선의 창시자다. 일본적인 선을 창시한 백은선사는 유명한 화가이며시인이자 조각가였다. 일본선에서 위대한 인물중 하나로 꼽히는 백은선사는 일본의 달마라고도 칭한다. 그만큼 달마를 많이 그렸으며 서화 民謠등에서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그는"달마도"외에도 여러 형태의 "자화상"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고, 명석 (2020년 4월 28일). “30. 일본 임제종 하쿠인 선사의 발원”. 《법보신문》. 법보신문. 2023년 9월 11일에 확인함.
바로 하쿠인 에카쿠(白隠慧鶴)다. 하쿠인은 법호인데, 그가 나고 자란 후지(富士)산의 영봉, 그 희디흰 산에서 은거했다는 의미에서 백은(白隱)이라 했을 것이다. 하쿠인(685~1768)스님은 일본 임제종의 개혁자이자 중흥조이다. 그로 인해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간화선이 일본 땅에 새롭게 뿌리를 내린다. 바로 단계적 화두 타파와 스승과 제자가 일대일로 대면하여 화두를 점검하는 독참(獨參) 지도다. 그는 또한 당시 사람들에게 맞는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기도 한다. 바로 한 손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척수음성(隻手音聲)의 화두다. “소리 없는 소리를 들어야 깨달음이다. 두 손은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한 손만의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대신통을 얻을 수 있다.(‘야부코지(藪柑子)’” 그는 에도시대 후지산 인근 시즈오카현(静岡県)의 하라쥬쿠(현재의 누마즈 시)에서 태어났다. 길에서 인마(人馬)를 중개하는 부유한 역장(驛長)의 집안이었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이와지로(岩次郎)였다. 신체적으로 연약한 몸이었지만 영특했다. 이와지로는 신앙심 깊은 어머니와 함께 절에 다녔으며, 어른들도 어려운 설법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 하인들을 모아놓고 그 이야기를 들려줄 정도였다. 11세 때 끔찍한 지옥 이야기를 듣고 개구리를 죽인 생각 때문에 공포에 떨게 된다. 그는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음경’과 ‘대비주’를 외우고 출가의 마음을 일으켰다. 15세 때 마침내 반대하던 부모의 허락을 받아 고향마을 송음사(松蔭寺, 쇼인지)로 출가한다. 구도행각 중 20세가 되던 해에 그는 재기발랄한 자만심 때문인지 서예와 시문을 익히다가 출가를 후회하며 불상과 경전 보는 것을 혐오한다. 어디로 갈 것인지 괴로워하며 바른 길을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때 그에게 들어온 책이 운서주굉의 ‘선관책진(禅関策進)’이었다. 거기서 졸음을 쫓기 위해 자신의 살을 송곳으로 찌르는 치열한 수행담을 보고 재발심하고 선의 길로 들어선다. 23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서 수행할 때 후지산이 분화(噴火)하여 땅이 요동쳐 송음사 당우들이 크게 흔들리고 화산재가 비오 듯 날려 절의 모든 대중이 도피했지만 그만이 홀로 남아 좌선에 들었다. 그 지옥 같은 세상에서 하쿠인 마음은 맹렬한 구도심으로 타올랐다. 그는 정수노인(正受老人)으로 불리는 스승 도쿄에단(道鏡慧端) 밑에서 공부중 아만심을 철저히 떨쳐버리고 크게 깨닫는다. 그는 좌선의 중요성을 노래한다. ‘좌선화찬(坐禅和讃)’이다. 일종의 발원문으로 봐도 좋다. “중생이 본래 부처니 물과 얼음 같아라. / 물 떠나 얼음 없으며 중생 밖에 부처 없네. 가까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중생, 멀리서 구하는 덧없음이여. / 물속에 있으면서 갈증을 절규하는 것 같고 / 부잣집 자식임에도 가난한 동네를 헤매는 것과 다름없네. (중략) 자신을 향해 바로 자성을 증명하면 자성 곧 무성(無性)으로 되어 희론을 벗어나리. 인과일여(因果一如)의 문 열리어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닌 길로 곧바로 드네. 모습 없음을 모습으로 삼으면 가도, 돌아가도 남의 집이 아니리라. / 생각 없음을 생각으로 삼으면, 노래도 춤도 모두 법의 소리라 / 삼매의 걸림 없는 하늘 넓고 지혜의 둥근 달빛 휘영청 밝아라. / 이 때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적멸이 현전하기에 / 이곳이 곧 연화국이요, 이 몸이 곧 부처의 몸이네.”
- ↑ 전, 경익 (2019년 1월 14일). “칼럼-도(道)가 깊어지면 예지(叡智)도 깨어난다(Ⅰ)”. 《경남도민신문》. 경남도민신문. 2023년 9월 13일에 확인함.
일본 막부(幕府)시대 중엽에 유명한 고승 백은선사(白隱禪師)는 1768년 12월 7일 주치의가 맥을 짚고 “이상 없습니다”라고 진단을 내리자 다음과 같이 말하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3일 후에 죽을 사람의 죽음을 예견치 못하는 것을 보면 당신도 명의(名醫)는 아니구먼!”과연 3일 후 12월 10일 여든네 살의 고승 백은선사는 뒷일을 제자들에게 맡기고 11일 새벽잠에서 깨면서 “음!”하고 대성(大聲)을 내며 입적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 보성 스님, 보성 스님 (2008년 2월 26일). “[2007 동안거 해제법어]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보성 스님”. 《법보신문》. 법보신문사. 2023년 9월 12일에 확인함.
백은선사는 눈밝은 지도자를 못만나 선관책진을 스승으로 삼고 열심히 공부해서 깨쳤으나 인가해줄 스승이 없었다. 토굴 앞에 흐르는 시냇물을 보고 내가 만일 바로 깨쳤으면 거꾸로 흘러가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물이 거꾸로 흐르는 것을 보고 깨쳤다는 자신을 얻고나서 종횡무진으로 법문을 설하고 다니다가
- ↑ 가 나 백, 성호 (2018년 6월 28일). “갓난 아기의 아빠가 스님이라고?”. 《중앙일보》. 중앙일보. 2023년 9월 12일에 확인함.
백은은 종횡무진 법문을 쏟아내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한 거사를 만났습니다. 그 거사가 백은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님께서 정말 깨쳤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한 손만으로 소리를 내보시오!" 이 말을 들은 백은은 말문이 탁 막히고 말았습니다. ~~~ 이 날부터 백은은 입을 닫았습니다. 법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향해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피나는 수행에 들어간 겁니다. 그렇게 수행의 세월이 꽤 흘렀습니다. ~~~ 하루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백은은 처마 아래 앉아서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습니다. 비 오는 날, 아궁이 앞에 앉아 있으면 참 아늑하잖아요. 백은도 그렇게 따듯하게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처마 밖에선 ‘후두둑 후두둑’ 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처마 끝에서는 ‘뚝, 뚝’ 빗방울이 쉬지 않고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백은이 앉아있던 아궁이가 꽤 좁았나 봅니다. 아니면 백은이 딴 생각 하느라 잊고 있었던 걸까요. 당시 그의 몸은 반 정도가 처마 밖으로 나가 있었습니다. 줄기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으니 백은의 반신이 비에 흠뻑 젖었습니다. 반면 아궁이 앞쪽의 반신은 바짝 말라 있었습니다. 반은 젖고, 반은 마르고. 처음에 백은은 그걸 몰랐습니다. 뒤늦게 그걸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크게 깨쳤습니다. ~~~ 이제 백은 선사는 한 손만 들어도 소리를 냅니다. 어떤 소리냐고요? 창가로 불어 대는 바람소리, 숲속에서 들리는 새소리,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 세상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가 이제 백은 선사의 소리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 모두가 백은 선사가 들어선 ‘더 큰 나’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손만으로 소리를 내는 법 절에 가면 우리는 가끔 ‘천수관음상’을 만납니다. 천 개의 손, 천 개의 눈을 가진 보살입니다. 왜 그에게 천 개의 손이 있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손들이 다 ‘더 큰 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나와 동생이 심하게 싸웠습니다. 나는 내 일만 하고, 동생은 동생 일만 합니다. 서로 미워할 뿐, 서로 돕지는 않습니다. 그때는 내게 ‘두 개의 손’ 뿐입니다. 그러다 내가 고집을 허뭅니다. 그리고 동생에게 사과를 합니다. 동생도 마음을 풉니다. 그때부터는 달라집니다. 서로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도와줍니다. 그럼 내게 몇 개의 손이 생긴 걸까요? 맞습니다. 내게는 네 개의 손이 생긴 겁니다. 그런 식으로 나의 고집, 나의 잣대를 허물며 상대를 만나다 보면 ‘나의 손’이 점점 많아집니다. 나중에는 백 개의 손, 천 개의 손도 가지게 됩니다. 그때 내가 한 손을 들면 어찌 될까요. 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소리를 낼 수 없을까요. 맞습니다.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동생이 소리를 내고, 친구가 소리를 내고, 이웃이 소리를 내고, 자연이 소리를 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소리가 실은 ‘나의 소리’가 됩니다. 그게 ‘불이(不二ㆍ둘이 아님)’에 담긴 놀라운 이치입니다.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불교신문, 불교신문 (2002년 2월 15일). “禪師들의 禪문답 - 백은선사”. 《불교신문》. 불교신문. 2023년 12월 15일에 확인함.
‘한 손바닥에서 나는 소리’라는 척수성음의 공안으로 유명한 백은선사와 정수노인과의 선문답이다. 백은선사는 자신의 깨우침을 시험하기 위해 당시 일본 임제종의 정맥으로 불리는 지도무난선사의 제자인 정수노인을 찾아가 자신의 게송을 써서 올렸다.정수노인은 그 게송을 읽지도 않고 한 손으로 움켜쥐고 다른 한 손을 내밀면서 물었다.이런 종이는 필요 없다. 그대의 알음알이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깨달은 바를 내놔 보거라” 백은선사가 대꾸했다. “깨달음 그런 시시한 것이 있다면 바로 토해버리겠소”백은선사는 “억 억” 소리를 내며 토하는 시늉을 보였다. 그런 백은을 물끄러미 보고있던 정수노인이 더욱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대는 조주의 무(無)를 어떻게 보았는가” “무는 무. 어디에 보거나 손댈 것이 있겠습니까” 백은선사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정수노인은 그의 코를 잡아 세게 비틀며 말했다.“어떤게 보거나 손댈 것이 없다면 어떻게 이렇게 큰 손이 그대의 얼굴에 붙어서 코를 잡아 비틀 수 있겠는가” 백은선사가 머뭇거리자 정수노인이 재차 물었다. “말해보게 남전화상은 천화(遷化)하여 어디로 가셨는가” 백은선사는 양손으로 귀를 막고 밖으로 도망쳤다. 도망치는 백은선사의 등 뒤로 정수노인의 일갈이 틀어 박혔다.“이 귀신굴속에 처박힌 엉터리야” 백은선사는 자신의 깨달음이 엉터리였음을 인정하고 정수노인의 문하에서 참선수행에 들었다. 깨달음을 얻기위해 전력투구하던 어느날 산밑으로 탁발을 나갔다. 백은선사는 어떤 집앞의 처마밑에서 그대로 화두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때 그 집 주인이 몇 번이나 비켜달라해도 비켜주지 않자 화가나 대나무 빗자루를 들어 그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백은선사는 주인의 일격에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화두삼매에서 깬 백은선사는 자신을 후려친 주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손뼉을 치며 웃었다. 백은선사가 돌아와 정수노인에게 절을 올리자 노인은 기뻐하며 말했다. “음 됐구나 됐어”
- ↑ 가 나 다 라 마 우, 희종 (2015년 10월 20일). “신도의 명예와 부끄러운 승려”. 《불교닷컴》. 불교닷컴. 2023년 9월 12일에 확인함.
수행으로 명성이 드높아 살아있는 부처라고 일컬어지던 하쿠인 선사에게 많은 스님들이 몰려 함께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산 아래 마을 처녀가 동네 총각과 사랑에 빠져 임신을 하게 되었다. 처녀가 임신한 사실이 드러날 때의 동네 비난과 연인이 다칠 것을 염려하던 여인은 워낙 명성이 높기에 그냥 넘어갈 것으로 생각해서 아이의 아버지가 하쿠인 선사라고 말했다. 성난 마을 사람들은 선사에게 찾아가 각종 욕을 하며 수행은커녕 여자에 손대는 자라고 소란을 피우자 가만히 앉아 듣고 있던 선사는 이윽고 일을 열어 ‘그렇습니까?’라고만 대답하였다. 이를 지켜본 많은 스님들은 수근 거리면서 사찰을 떠나갔고, 이윽고 10개월이 지나 아기가 태어나고 여인의 부모는 어린 젖먹이를 데리고 사찰로 올라가 하쿠인 선사에게 갖다 주며 ‘당신 아이니 당신이 기르시오’ 했다. 그때도 선사는 '그렇습니까?'라고하면서 아이를 받았고, 이에 그나마 남아 있던 스님들도 떠나고 그 많던 신도들은 발길을 끊었다. 선사는 묵묵히 힘들게 젖동냥과 탁발로 아이를 정성껏 길렀다. 한편, 아이를 못 잊고 아이까지 태어난 상황에서 가정을 이루고자 딸은 모든 자초지종을 이야기했고, 놀란 아버지와 주민들은 이제는 몇 안 남고 모두 떠나간 황량한 절에 홀로 조용히 앉아 아이와 함께 있는 선사에게 찾아가 백배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선사는 이번에도 담담히 또 다시 '그렇습니까?‘ 라면서 아이를 여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 ↑ 가 나 다 한국경제신문, 한국경제신문 (1992년 8월 8일). “< 천자칼럼 > 일본의 침묵”. 《한경닷컴》. 한국경제신문. 2023년 9월 11일에 확인함.
젊은 사무라이 오다 시게노부(직전신무)가 불법을 열심히 닦았으나 번뇌를 끊을수가 없었다. 어느날 그는 당대의 고승 백은선사를 찾았다. "극락과 지옥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켜 주십시오" 젊은 사무라이는 정중히 선사에게 묻는다. "무엇을 하는 젊은이인가"라는 선사의 물음에 시게노부는 "보시다시피 이름있는 무사"라고 대답한다. 이에 고승은 "무사면 무사답게 전장에나 나갈 일이지 극락이나 지옥을 찾아 다니느냐. 못난 무사녀석 같으니라고" 머리끝까지 피가 치솟은 시게노부는 "지금 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한칼에 베겠다"고 일갈. 이에 고승은 "역시 자네는 보잘것없는 겁쟁이 무사구먼"하면서 대응. 화가 치민 사무라이가 긴 일본도를 빼내 당장 치려는 순간 고승이 말한다. "잠간 기다리게. 바로 그곳이 지옥이야"시게노부의 눈앞이 환하게 밝아왔다. 그는 머리를 깊이 숙이고 "감사합니다. 잠시의 노여움 때문에 일생을 망칠뻔 했습니다. 지옥이 있는 곳을 알았습니다"며 무릎을 꿇었다. 노승은 빙그레 웃으면서 "자네는 지금 극락의 바로 입구에 서 있는거야"라며 젊은이의 어깨를 두드린다. 깨달음이 바로 극락이라는 이야기다.
- ↑ 가 나 전, 경익 (2019년 1월 14일). “칼럼-도(道)가 깊어지면 예지(叡智)도 깨어난다(Ⅰ)”. 《경남도민신문》. 경남도민신문. 2023년 9월 13일에 확인함.
일본 막부(幕府)시대 중엽에 유명한 고승 백은선사(白隱禪師)는 1768년 12월 7일 주치의가 맥을 짚고 “이상 없습니다”라고 진단을 내리자 다음과 같이 말하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3일 후에 죽을 사람의 죽음을 예견치 못하는 것을 보면 당신도 명의(名醫)는 아니구먼!”과연 3일 후 12월 10일 여든네 살의 고승 백은선사는 뒷일을 제자들에게 맡기고 11일 새벽잠에서 깨면서 “음!”하고 대성(大聲)을 내며 입적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 가 나 정운스님, 정운스님 (2014년 3월 4일). “〈48〉눈물을 위하여”. 《불교신문》. 불교신문사. 2023년 9월 13일에 확인함.
17세기 일본의 하쿠인(白隱, 1685~1768)은 청정한 선사로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는 분이다. 당시 하쿠인의 수행 지도로 깨달음을 이룬 보살이 있었다. 주위에서 그녀에게 도를 물을 정도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불행히도 그녀는 사랑하는 딸을 잃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식 잃은 여느 엄마와 똑같이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큰스님 밑에서 수행하여 인가를 받은 사람이 어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가?”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 추운 것은 추운대로 받아들이고 더운 것은 더운대로 받아들여야 하듯, 슬픈 것은 슬픈대로 기쁜 것은 기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를 현실적으로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고 무엇이 문제인가. 그렇지만 슬퍼하되 슬픔에 빠지지 않고, 기뻐하되 그 기쁨에 빠지지 않는 것, 곧 그 일어난 당처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진실된 자유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