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씨는 본래 강릉 함씨(江陵 咸氏, 관향: 강원특별자치도강릉시)와 양근 함씨(楊根 咸氏, 관향: 경기도양평군) 등으로 나뉜 한국의 성씨였다. 하지만 함혁(咸赫)을 원조(原祖)로 하는 동원분파(同源分派)이므로 1936년 병자보(丙子譜) 편찬시 합보(合譜)[1]되어 본관을 구분하지 않는다.
함씨의 선계인 함혁은 마한 소국(小國)의 왕이었다는 설, 중국 한나라의 대장군이었다는 설과 중국 당나라의 병부상서, 평장사였다는 설이 존재하는데, 용문사, 사나사, 함왕성과 함왕혈(咸王穴) 등 문화재와 지역 설화를 근거로 마한(소국)의 왕이었다는 설이 대체로 타당성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2]
혁(赫)은 경기도양평용문산을 중심으로 소국(小國)을 세우고 다스렸는데, 그래서 후손들은 혁(赫)의 첫 세거지인 양근(楊根, 경기도양평군의 옛 지명)을 본관으로 하였다.
신라의 함씨는 호족가문이었다. 신라 중기, 신(信)은 원성왕과의 왕위쟁탈전에서 패한 김주원(강릉 김씨의 시조)을 보좌하여 현재 강원도강릉인 명주 지역으로 가서 그 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3]
함씨는 고려, 조선의 개국 당시 모두 활약하였는데, 고려 개국 시에는 중시조 규(規)가 개국 공신이 되어 태조 왕건으로부터 왕씨 성을 하사 받고, 고려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그는 '왕규의 난'으로 잘 알려진 왕규[4]와 동일인이다. 그는 왕규의 난의 중심 인물로 혜종 지지파였던 개경파와 정종ᆞ광종 지지파였던 서경파 간 정쟁(政爭)의 장본인. 5대손 유일(有一)은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뒤에 공부상서에 이르렀으며, 아들 순(淳)은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강좌칠현(江左七賢)으로 일컬어졌다.
조선 개국 당시 함씨는 형제가 소신에 따라 길을 달리한다. 함부림(咸傅霖)은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에 올라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8도의 관찰사를 모두 지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우 부열(傅說)은 고려 말에 예부상서, 홍문관 박사 등을 지냈으나 조선 왕조에는 동참을 거부한다. 특히 이들 형제의 후손들은 본관도 달리하는데, 부림(傅霖)계는 강릉, 부열(傅說)계는 양근을 쓰게 되었다. 부림의 아들 함우치(咸禹治)는 세조 때 여러 도(道)의 관찰사를 지냈고, 성종 때 좌참찬에 이르렀다. 부호군(副護軍) 좌무(佐武)의 아들 헌(軒)은 중종 때 명나라에 갔다가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공자유상(孔子遺像)을 가지고 왔는데, 한국에 공자 영상이 들어온 시초라고 한다.
특히 근현대에 들어와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을 지낸 태영(台永)은 구한국(舊韓國, 大韓帝國) 한성재판소검사로서 ‘독립협회 사건’ 당시 이상재(李商在)ᆞ윤치호(尹致昊)ᆞ신흥우 등의 무죄를 주장하고 석방했는가 하면, 그 뒤에도 계속 독립운동과 종교운동에 헌신,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정관계에는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병춘, 농림부 장관을 역임했고, 강원대학교의 설립자인 인섭, 각각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인 석재, 종빈, 종한,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전(前) 해군참모총장명수, 역시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재훈, 상공부(산업통상자원부) 차관과 초선 국회의원을 지낸 덕용이 있다. 학계에는 상공부 차관을 지내고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인영, 한국인 최연소로 28세에 하버드대학교 교수로 임용된 돈희, 경북대 총장을 역임한 인석, 아산정책연구원장 및 이사장을 역임한 재봉이 있고, 법조계에는 제39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낸 정호, 대검중수부 검사, 법무법인 대륙아주의 설립자, 정치인(16대 국회의원)으로 명망이 높은 승희가 있으며, 금융계 및 재계에는 장기신용은행장과 회장, 하나은행 회장을 역임한 태용, KEB하나은행장을 거쳐 하나금융그룹 회장으로 재임 중인 영주, 오뚜기 회장으로 재임 중인 영준이 있다.
함규(咸規, 생년 미상 ~ 945년) : 함씨의 중시조(中始祖)이자 고려의 개국공신(開國功臣), 권신(權臣). 고려 초기 광주(廣州)의 대호족으로, 양근 함씨였으나 개국공신으로 태조에게 왕씨 성을 사성 받아 왕규(王規)가 된다. 함규는 당시 양근을 포함한 광주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인물이었고, 함규는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익찬개국공신(翊贊開國功臣) 등의 작위를 받았다. 중부의 강력한 호족이었던 함규는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고,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대광(大匡), 광평시랑평장사(廣平侍郞平章事)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왕규는 혜종을 보필하라는 태조의 유지를 받들었으나, 혜종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위 쟁탈전인 왕규의 난(王規之亂)으로 처형당하였다.
함유일(咸有一, 1106년 ~ 1185년) : 고려의 관리. 자는 형천(亨天). 고려 개국공신 함규(規)의 5세손이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친구인 재상(宰相) 이준양(李俊陽)의 도움으로 처음 관직에 올랐으며, 1135년 묘청의 난을 평정할 때 공이 있어 추밀원사(樞密院使) 왕충(王沖)의 추천으로 선군기사(選軍記事)가 되었다. 의종 재위기에 교로도감에 있을 당시 서울에는 무당과 음사(귀신을 모시는 집)가 많아 민심을 현혹시켰다. 그는 이 음사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무당들을 서울 밖으로 내쫓아 미신을 배척한 자로서 유명하였다. 이후, 감찰어사(監察御史), 황주판관(黃州判官), 삭방도감창사(朔方道監倉使)를 거쳐, 명종 때 병부낭중(兵部郎中)·공부상서(工部尙書) 등을 지냈다. 그는 자녀들에게 가난함이 절대로 수치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일생동안 베옷만을 입었으며 질그릇만을 쓰는 등 청빈하게 살았다.
함순(咸淳) : 고려 중기의 문장가. 자는 자진(子眞). 고려 개국공신 규(規)의 6세손이며, 명종 때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치사(致仕)한 유일(有一)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절행(節行)이 있었다. 또한, 순박하고 중후하여 정도(正道)로 책임을 삼으며 효경과 충신을 바탕으로 한 문사(文辭)가 탁월하였다. 최충(崔冲)이 설립한 문헌공도(文憲公徒) 출신으로 급제 후 양양과 남방 어느 고을의 지방관이 되었고, 감찰어사(監察御史), 형부낭중(刑部郞中), 병부시랑(兵部侍郞) 등을 역임했으며, 최충헌(崔忠獻) 집권시에는 사직(司直)이라는 한직에 머물렀다.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黃甫抗)·이담지(李湛之) 등의 명유(名儒)들과 교류를 맺고 진(晋)나라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떠 강좌칠현(江左七賢)을 조직하여, 시(詩)와 술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함부림(咸傅霖, 1360년 ~ 1410년) : 조선의 개국공신(開國功臣). 고려 개국공신 규(規)의 13세손인 승경(承慶)의 맏아들로, 태조, 정종, 태종 세 임금을 섬기면서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대사헌(大司憲),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명성군(溟城君), 동원군(東原君)에 봉해졌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선(朝鮮)에서 8도(경기, 충청, 경상, 전라, 강원, 황해, 평안, 함경도)의 관찰사(觀察使)를 모두 지낸 두 인물 중 한 명이다.[5].[6] 시호는 정평(定平). 강릉 함씨 정평공파의 파조(派祖)이다.
함부열 : 고려의 문신. 고려 개국공신 규(規)의 13세손인 승경(承慶)의 둘째 아들로, 고려 우왕 1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공양왕 2년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함씨 가문 야사(野史)에 의하면, 그는 공양왕 사후, 왕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묘지 위에 가묘(假墓)로 위장했다고 한다. 고려 왕조에 충성을 다한 만고충절의 학사이며, 양근 함씨 죽계공파의 파조(派祖)이다.
함부실(咸傅實): 고려 개국공신 규(規)의 13세손인 승필(承慶)의 외아들로 강릉 지역의 호족세력으로 고려말에 한원천호(漢原千戶)의 벼슬을 하시고 조선 개국 후 보국숭록대부 예조판서의 벼슬로 증하였다. 예판공파의 파조(派祖)이다.
함화(咸華, ? ~ ?) : 조선의 문신. 조선조(朝鮮朝), 현령을 역임. 최치운(崔致雲, 1390년 ~ 1440년)의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함씨(咸氏)의 아버지이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烏竹軒)은 바로 이 최치운이 지은 고택(古宅)이다. 함화의 사위인 최치운에게서 함화의 외손이자, 최치운의 아들인 최응현(崔應賢,1428년∼1507년)에게 상속이 되었고, 최응현의 사위인 용인 이씨 이사온(李思溫)에게 상속이 되었다가 이사온의 사위인 신명화(申命和)에게 상속이 되었는데, 신명화는 바로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아버지이자, 율곡 이이(李珥)의 외조부이다. 즉, 함화의 딸인 정경부인 함씨는 신사임당의 외고조모이다.
함우치(咸禹治, 1408년 ∼ 1479년) : 고려 개국공신 규(規)의 14세손인 부림(傅霖)의 아들.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同副承旨), 공주목사(公州牧使), 함길도·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觀察使)를 두루 역임하고, 대사헌(大司憲),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올랐으며, 같은 해에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는데, 재임할 때는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후,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어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졌으며, 1470년(성종 1)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좌우참찬(左右參贊)을 역임, 뒤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평양(平襄).
함헌(咸軒, 1508년 ∼ ?) : 고려 개국공신 규(規)의 14세손이자 정평공파의 파조인 부림(傅霖)의 5세손. 아버지는 부호군 좌무(左武). 자는 가중(可中). 호는 칠봉(七峰)이다. 1534년(중종 29) 알성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간성군수가 되었다. 1552년(명종 7)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있을 때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이천부사(利川副使)가 되었다. 1562년 삼척부사(三陟副使)를 지냈으며, 재임 중 관리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백성들을 구휼하여 치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칠봉문집(七峰文集)』이 있다. 중종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오자도가 그린 공자의 초상을 강릉으로 가져와 오봉서원(五峯書院)을 세웠다. 강릉 함씨 칠봉공파의 파조(派祖)이다.
함태영(咸台永, 1873년 ~ 1964년) :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 제2대 심계원(감사원의 전신) 원장, 법조인(대한제국, 일본총독부의 판사 및 검사 역임), 독립운동가, 종교인, 정치인[7]
함병춘(咸秉春, 1932년 ~ 1983년) : 학자,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비서실장, 주미한국대사, 대통령 외교안보특보, 정치특보[8]
함인섭(咸仁燮, 1907년 ~ 1986년) : 학자, 대한민국 제6대 농림부 장관, 강원대학교의 설립자 (초대 학장)[9]
함명수(咸明洙, 1928년 ~ 2016년) : 군인, 정치인, 대한민국 제7대 해군참모총장, 제9, 10대 국회의원, 국회 보건사회위원장[10][11]
함석재(咸錫宰, 1938년 ~ ) : 법조인, 서울지검 차장검사, 제14, 15, 16대 국회의원, 국회 법사위원장, 농림해양수산위원장[12][13]
함종한(咸鐘漢, 1944년 ~ ) : 정치인, 한국 스카우트연맹 회장, 제28대 강원도지사, 제12, 13, 15대 국회의원[14][15]
함종빈(咸鐘斌, 1923년 ~ 2009년) : 정치인, 제5, 9, 10대 국회의원[16][17]
공양왕은 폐위 후 처음에는 강원도원주로 유배되었다가 간성으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다시 삼척으로 옮겨진 뒤에 그 곳에서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간성왕(杆城王)이라는 호가 붙여졌다.[83]
처형 되기 전 유배에 올랐을 때, 몰래 뒤따르던 이가 있었다. 바로 고려 우왕 13년(1387)에 과거에 급제하고 홍문박사와 예부상서를 지냈던 함부열(咸傅說)이다. 함부열의 친형은 함부림(咸傅霖, 1360~1410)으로, 이성계를 도왔으며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개성소윤(開城少尹)에 임명된 인물이다. 그는 후일 형조판서(刑曹判書)와 대사헌(大司憲), 8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불행하게도 형과 동생은 조선과 고려로 갈라서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간성으로 온 함부열의 후손들은 양근 함씨로 본관을 달리 쓰기에 이르렀다. 양근은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으로, 함씨의 시조인 함혁(咸赫)이 삼한시대에 양평의 군주(君主)인 함왕주악(咸王周鍔)으로 불리게 되었다.
함부열은 간성왕을 따라 간성에 살게 됐다. 간성왕이 머문 수타사는 지금은 폐사되고, 애초에 5층이었을 석탑 한 기만이 밭 가운데에 덩그렇게 남아 있다. 절터는 계곡 안쪽에 있는데, 그다지 넓어 보이지는 않는다. 함부열은 수타사의 아랫마을인 금수리에 터를 잡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금수리에는 그의 종손을 포함한 후손들이 아직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함씨 가문 야사에는 간성왕의 최후가 좀더 상세하게 전해오고 있다. 1394년 3월에 함부열은 삼척으로 두 번째 유배되는 간성왕의 뒤를 따랐다. 내려간 지 한 달 만에 간성왕을 살해하러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왔다. 역사 기록에는 중추원부사 정남진이 내려왔다는데, 함씨 가문 야사에는 함부열의 형 형조의랑 함부림도 동행했다고 한다. 함부열은 마주친 형에게 간청하여 다른 왕족의 시신만 거두게 하고 간성왕을 간성으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정남진과 함부림은 도저히 조정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서 간성으로 자객을 보내 간성왕을 살해해버렸다. 그게 공양왕 삼척 사망일인 4월17일에서 8일이 더 지난, 4월 25일의 일이라는 것이다. 살해된 간성왕은 금수리 수타사에서 가까운 고성산 기슭에 묻혔다고 한다. 매장을 주도한 사람은 함부열이다. 함부열은 유언으로 간성왕 밑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묘에 제사 지내기 전에 왕 무덤에 축문 없는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함혁은 한반도 정주(定住) 세력이자 삼한 초기 한강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이 각각의 소국(小國)을 형성할 때 용문산 서록(西麓 : 현재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상곡)에 석성(石城)을 쌓고 웅거(雄據)한 군주(君主)로 세칭(世稱) 함왕주악(咸王周鍔)이라 불리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 기슭에는 "함왕성"으로 불리는 석성의 윤곽이 남아 있다. 용문산 사나사 계곡에는 함왕혈(咸王穴)이라는 바위굴도 있다. 지금도 양평에는 함왕 또는 함씨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또는 함규의 후손 함제(濟)가 명주(溟州: 현재의 강원도강릉시)로 이주하면서부터 후손들이 양근 함씨에서 분적(分籍)하여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는 설도 존재한다.
↑중시조 규는 고려 초기 광주(廣州)의 대호족으로, 양근 함씨(咸氏)였으나 개국공신으로 왕씨(王氏) 성을 하사 받게 되며, 고려 태조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익찬개국공신(翊贊開國功臣)에 책록되었고,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대광(大匡), 광평시랑평장사(廣平侍郞平章事)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