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白磁 鐵畵葡文 壺)는 산화철로 포도 무늬를 그려 넣은, 조선 백자 항아리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107호로 지정되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보 | |
종목 | 국보 제107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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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 1개 |
시대 | 조선 (18세기) |
소유 |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
참고 | 높이 53.3cm, 아가리지름 19.4cm, 밑지름 18.6cm |
위치 | |
주소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52, 박물관 (대현동) |
좌표 | 북위 37° 33′ 46″ 동경 126° 56′ 46″ / 북위 37.56278° 동경 126.94611° |
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개요
편집백자의 제작에서 산화 철을 사용하여 무늬를 넣는 철화문 기법은 고려시대부터 제작되던 분청사기의 철화문 기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철화문 백자에 그려진 식물로는 매화, 난, 국화, 대나무, 초화문, 포도 등이 있다.[1] 철화문 백자는 백토로 빚어 초벌구이한 도자기 위에 산화철 가루인 철사로 그림을 그리고 투명한 유약인 백자유를 뿌린 후 구워 만든다. 철화백자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지만, 17세기에 크게 유행했는데 임진왜란 이후 값비싼 청화 안료 대신 쉽게 구할 수 있는 철사를 널리 사용했기 때문이다.[2] 조선은 질 좋은 백자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관요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는데, 1467년경 경기도 광주시에 설치된 사옹원(司甕院) 분원은 그 중에서도 최상의 백자를 생산한 것으로 유명하다.[3]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는 18세기무렵 제작되어 일본과 한국을 오고 가는 우여곡절 끝에 1965년 이화여자대학교에 소장되었으며, 그 후로 지금까지 한국의 조형미를 대표하는 도자기로 뽑힌다.[4] 이 백자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철도주식회사 전무였던[5] 시미즈 고지(淸水幸次)라는 고미술품 수집가가 소장하였으나 해방 이후 고지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한국인 김 아무개에게 맡겼던 것이 암거래 되었다. 1946년 김 아무개는 권명근에게 2만 5천원에 이 백자를 팔았고, 권명근은 당시 수도경찰청장 이었던 장택상에게 넘겼는데, 장택상은 장물이라는 점을 들어 권명근을 겁박하고 5만원을 주며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6] 이 과정에서 권명근은 경찰에 끌려가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장택상은 소유권이 김 아무개에게 있는 것으로 문서를 조작하여 백자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7] 장택상은 1960년 정치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백자를 미술품 시장에 내 놓았다. 김활란이 이를 1만 5천환에 사들여 1965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다.[6]
높이는 53.8 cm로 매우 큰 편이고, 포도문은 입구 바로 아래에서 몸체의 상반에만 그려 넣어 여백의 미를 살렸다. 철사의 농담을 조절해 잎과 가지, 포도송이를 능란한 필치로 살려낸 솜씨가 탁월하다.[2] 포도그림은 예로부터 장수와 풍요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널리 사랑받아 왔다. 특히 17-18세기에 조업했던 경기도 광주의 관요 가마터에서 철화로 포도문을 그린 백자파편들이 수습되는데, 온전한 모양을 갖춘 것으로는 이 항아리가 거의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이와 유사한 크기와 형태의 항아리에 윤룡문이 그려진 용준(龍樽)이 왕실 의례용으로 사용된 바가 있어 큰 연회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8] 이런 항아리는 장호(長壺)라고 하는데 궁중 연회에서 술항아리로 쓰였다.[5]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이외에 또 다른 철화문 백자로는 대한민국 국보 93호인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가 있다.[9]
특징
편집18세기 영조 때 금사리 가마에서 빚어낸[5]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는 조선후기 왕실관요의 결정체로 달항아리와 같이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든후 이어 붙여 구운것이다. 몸 전체에 유약을 고르게 발라 이어진 부분이 도드라지지 않게 하였다.[10] 기형(器形)은 목이 짧고 어깨가 당당하게 벌어져 아래로 갈수록 좁아진다. 몸체 중간에 부분적으로 보이는 가로줄은 대형의 항아리를 만들기 위해 위와 아래를 따로 만들어 접합했던 흔적으로 굽는 과정에서 틈이 벌어져 생긴 것이다.[8] 항아리의 일부분에 유약이 벗겨져 태토가 드러난 것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유약이 고르게 입혀졌고 몸체도 정제가 잘 된 고운 백토로 만들어져 매끄럽다.[8]
항아리의 기면 전체에 검은 빛깔의 철사(鐵砂) 안료로 묵(墨)의 농담(濃淡)을 주면서 그려진 이파리와 포도넝쿨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한 폭의 묵포도도(墨葡萄圖)를 연상케 한다. 이러한 포도그림은 당시의 화원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예상되며,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와 세부표현 등에서는 심정주(沈廷胄, 1678-1750)나 권경(權儆, 생몰미상), 혹은 이인문(李寅文, 1745-1821)같은 18세기의 화가들의 포도화풍에 비견되기도 한다. 이 항아리의 저기적인과 회화적이고 문기 넘치는 문양 표현은 여타의 포도문을 뛰어넘는 회화성을 보여주는 18세기 조선 백자 항아리 중에서도 뛰어난 제작 솜씨를 보여주는 수작(秀作)이다.[8] 당대 일류의 화공이 그린 것은 분명하나 누가 그렸는지 짐작되는 사람은 없다.[5]
각주
편집- ↑ 이상희,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2》, 넥서스북스, 2004년, ISBN 978-89-5797-024-9, 116-118쪽
- ↑ 가 나 도자기가 있는 단상 .16 -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영남일보, 2006년 1월 1일
- ↑ 경기도자박물관, 〈가평 하판리유적 - 조선 중기 철화백자운룡문항아리를 구운 지방 가마터〉, 《고고학저널 38》, 2008년, 106쪽
- ↑ 장남원 (2002년). “백자철화 포도문 항아리” (PDF). 《박물관문화》 (봄·여름호). 2016년 11월 8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1월 8일에 확인함.
- ↑ 가 나 다 라 유홍준의 국보순례 50 - 백자 철화 포도문 항아리, 조선일보, 2010년 3월 10일
- ↑ 가 나 이광표, 컬렉터 김활란과 백자철화포도무늬 항아리 Archived 2016년 11월 4일 - 웨이백 머신, 미술세계
- ↑ 조선 백자중 으뜸 Archived 2016년 11월 4일 - 웨이백 머신, 팝콘뉴스, 2007년 6월 7일
- ↑ 가 나 다 라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2015년 5월 27일). 《조선백자》.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 ↑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 문화재청
- ↑ 장남원, 한국의 美 -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14)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 Archived 2016년 11월 4일 - 웨이백 머신, 교수신문, 김달진 미술연구소 재인용
참고 자료
편집-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백자 철화 포도무늬 항아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 백자 철화 포도무늬 항아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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