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념처
사념처(四念處)는 불교의 37도품 수행법 중 한 그룹으로, 몸 · 느낌 · 마음 · 법을 관찰하는 네 가지 알아차림(sati, 사띠) 수행 또는 명상법을 말한다. 이 네 가지를 각각 신념처(身念處) · 수념처(受念處) · 심념처(心念處) · 법념처(法念處)라고 한다.
4념처는 4념주(四念住)라고도 한다.
4념처의 구체적인 수행법은 신념처 · 수념처 · 심념처 · 법념처 문서에서 다루고 있다.
4념처에 대해 읽고 듣고, 생각하여 이해하고, 수행하여 일정한 또는 상당한 선정력과 지혜를 획득한 후에 다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대승불교 경전인 《좌선삼매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2][3][4]
- 마땅히 열반이라는 최선의 법 가운데 들어가서 머물러야 한다. 정진의 힘으로 깊은 선정에 들어 4념처 중 법념처에서 모든 존재의 실상을 관하건대 모든 것이 괴로움이어서 즐거움이 없으며 괴로움은 애착 등의 여러 가지 번뇌와 업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알아 열반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이 괴로움은 일체가 남김없이 사라진다.
즉, 자신의 현재 처지에서 최선을 다해 정진하여 4념처에 대해 읽고 듣고[聞所成慧], 4념처에 대해 생각하여 그 이치를 이성적으로 즉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이해하고[思所成慧], 4념처를 수행하여 일정한 또는 상당한 수행력을 획득했다면[修所成慧], 다시 정진(精進)을 일으켜 깊은 선정(禪定)에 들고 그 깊은 선정에서 법념처를 행함으로써, 즉, 《반야심경》에서 설하고 있는 바처럼 제법을 관[照]하여 그 모두의 실상이 괴로움 즉 무상 즉 공임을 알아차림[見]으로써[照見五蘊皆空], 유위와 무위 사이에 있는 심연(근본무명)을 건너뛸 수 있게 되어, 달리 말하면, 번뇌와 유위의 파도가 다 함께 적멸하여 열반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정진바라밀 · 선정바라밀 · 반야바라밀에 의해 열반 즉 마하반야 즉 대보리 즉 진여의 무분별지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모든 괴로움이 남김없이 사라진다[度一切苦厄]고 말하고 있다.
상좌부불교의 이론에 따르면 석가불이 열반한 후의 5000년 내에 사념처(四念處, 內觀, 위파사나) 수행은 여전히 수다원과(須陀洹果)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을 수 있으며, 사념처 수행은 유일한 방법이다. 마하시 사야도 또는 레디 사야도가 쓴 저서 등을 포함한 사념처와 관련된 서적을 읽어야 정확한 사념처 수행을 잘 이해할 수 있다.[5]
4념처 수행법
편집팔리어 경전 《디가 니까야》 제22경 〈대념처경〉과 《맛지마 니까야》 제10경 〈염처경〉에 수록된 4념처 수행법이 4념처를 다루고 있는 여러 불교 경전들 중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또한 전체적이다. 그리고 이 경전들을 매우 중시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상좌부 불교 전통에 따른 풍부한 주석서가 있어 경전 자체의 문구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사실상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참고로, 경전 자체에는 각각의 구체적인 수행법이 수록되어 있을 뿐 이들 수행법에 대한 명칭은 없다. 따라서 수행자들이나 연구자들 또는 경전 번역자들이 붙인 명칭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디가 니까야》 제22경 〈대념처경〉에 나오는 구체적인 4념처 수행법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구체적인 수행법 자체는 신념처 · 수념처 · 심념처 · 법념처 문서에서 다루고 있다.
신념처[6]
- 호흡의 출입에 대한 알아차림
- 몸의 상태에 대한 알아차림
- 몸의 행동에 대한 알아차림
- 몸을 구성하는 32가지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
- 몸의 4대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
- 죽은 시체에 대한 관찰
- 죽은 시체를 짐승들이 쪼아 먹는 모습에 대한 관찰
- 해골에 살과 피와 힘줄이 뒤엉켜 있는 모습에 대한 관찰
- 해골에 피와 힘줄이 뒤엉켜 있는 모습에 대한 관찰
- 해골에 힘줄만 남아 붙어 있는 모습에 대한 관찰
- 해골과 뼈가 흩어져 있는 모습에 대한 관찰
- 해골이 하얗게 바랜 모습에 대한 관찰
- 해골이 뼈 무더기로 변한 모습에 대한 관찰
- 뼈가 삭아 티끌로 변한 모습에 대한 관찰
수념처[7]
- 즐거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 괴로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 속된 즐거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 속되지 않은 즐거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 속된 괴로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 속되지 않은 괴로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 속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 속되지 않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심념처[8]
- 탐욕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 탐욕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 분노가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 분노가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 어리석음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 어리석음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 위축됨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9]
- 산란함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10]
- 넓은 마음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 넓은 마음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 우월한 마음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 우월한 마음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 고요한 마음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 고요한 마음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 해탈한 마음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 해탈한 마음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법념처[11]
- 다섯 장애[五蓋]에 대한 알아차림
- 다섯 집착된 온[五取蘊]에 대한 알아차림
- 여섯 터전[六入處]에 대한 알아차림
- 일곱 깨달음 요소[七覺支]에 대한 알아차림
-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의 법에 대한 알아차림
4념처의 중요성
편집4념처는 8정도의 정념(正念, right mindfulness)에 해당하는 수행법이다. 간접적으로는 정정(正定, right concentration)을 닦는 수행이다.
고마타 붓다가 열반에 들 무렵 아난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는 무엇에 의지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고타마 붓다는 "4념처에 의지하라"고 대답했다.
4념처 명상은 고요한 사마타(定, 止)와 관하는 위파사나(慧, 觀)의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되는 수행법이다. 4념처는 테라와다(남방 상좌부)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이며, 대승불교의 조동종에서도 수행한다.[12]
용어
편집염(念)과 사띠(sati)
편집4념처의 염(念)은 남방불교의 팔리어에서는 사띠(sati), 북방불교의 산스크리트어에서는 스므리티(smṛti), 영어에선 알아차림(mindfulness)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관(觀)한다고 할 때 관이 대부분 바로 념(念)을 뜻한다. 한국어로는 마음챙김 또는 알아차림으로 가장 많이 번역되지만, 새김, 깨어있음, 주의깊음, 마음집중, 마음지킴, 수동적 주의집중 등으로도 번역된다.
영어 mindfulness의 형용사형 mindful은 웹스터 사전과 옥스포드 사전에 따르면 '알아차리는'(aware)의 뜻이다.[13][14] 콜린스 사전에 따르면 '알아차리는'(aware)과 '주의를 기울이는'(heedful)의 뜻이다.[15] 따라서 mindfulness는 awareness(알아차림)와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4념처'라고 할 때의 념은 단순히 념(念, sati)이라는 마음작용 자체만을 뜻하지 않는다. 《아비달마품류족론》《아비달마구사론》《아비달마순정리론》《유가사지론》《현양성교론》《대승아비달마집론》《성유식론》 등 마음작용에 대해 설하고 있는 논서들에 따르면 념(念)은 그 자체로서는 기억력을 뜻한다.[16][17] 기억력이란 현재 대상을 명기(明記)하는 것 즉 명확히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서의 기억력은 이 1차 작용에 근거한 2차 작용이다. 4념처에서 의미하는 념, 즉, 기억력은 명확한 기억력을 뜻한다. 명확한 기억력이 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념이 아니라 대상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에 집중하는 형태의 념이 필요하다. 따라서 4념처의 념은 기억력과 주의력, 즉, 주의집중을 뜻한다. 정리하자면, 념 자체에는 여러 상태 또는 수준이 있는데 4념처의 념은 주의집중 상태 또는 수준의 념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4념처에서의 념은 이러한 자체적 높은 수준에서의 념, 즉, 주의집중만이 아니고 혜(慧)를 근거로 하는 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판단력과 식별력, 즉, 알아차림, 즉, 반야가 함께 하는 념을 뜻한다.[18] 이러한 복합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4념처의 념은 단순히 '주의집중'이 아니라 '주의집중에 의한 알아차림'이다. 그리고 이 주의집중은 4념처의 구체적 수행법을 보면, 관찰 대상을 제어하려는 의도 없이 행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19][20][21][22] '오로지 능동적 주의집중[觀]'이라기 보다는 '수동적 주의집중[止觀]'이다. 따라서 4념처의 념은 '수동적 주의집중[念 = 止觀]에 의한 알아차림[慧]'이다.
이와 같은 념(念), 즉, 관찰을 〈대념처경〉 《중아함경》《잡아함경》 《별역잡아함경》등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것, 몸을 몸 그대로 관찰하는 것, 또는 단순히, 몸을 관찰하는 것',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것, 느낌을 느낌 그대로 관찰하는 것, 또는 단순히, 느낌을 관찰하는 것',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것, 마음을 마음 그대로 관찰하는 것, 또는 단순히, 마음을 관찰하는 것',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것, 법을 법 그대로 관찰하는 것, 또는 단순히, 법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고타마 붓다의 진술을 《아비달마대비바사론》《아비달마구사론》《대지도론》《좌선삼매경》《청정도론》《유가사지론》《성유식론》 등 사실상 모든 불교 종파의 후대의 논서들에서는 붓다의 다른 가르침과 함께 종합하여 전도(顛倒) 없이 관찰하여 전도 없이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전도는 4전도를 뜻한다. 즉, 부정한 법에 대하여 깨끗하다는 뒤바뀐 생각[淨顛倒]을 일으키는 것,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는 뒤바뀐 생각[樂顛倒]을 일으키는 것, 무상함에 대하여 항상하다는 뒤바뀐 생각[常顛倒]을 일으키는 것, 나가 없는데 대하여 나라는 뒤바뀐 생각[我顛倒]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붓다의 진술에 나타난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는 것의 의미 또는 내용을 보다 구체화하여 관찰이란 몸을 부정한 것이라고 관찰하고, 느낌을 괴로운 것이라고 관찰하고, 마음을 무상한 것이라고 관찰하고, 제법을 무아인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라고 본다.
법념처의 법
편집법념처에서 법(팔리어: dhammā)은 5개, 5온, 6처, 7각지, 4성제를 의미한다.
5개(五蓋)란 다섯가지 장애로서, 탐욕, 성냄, 나태와 졸음, 동요와 걱정, 의혹을 말한다. 5온(五蘊)이란 다섯가지 쌓임이라는 뜻으로, 색수상행식을 말한다. 6처(六處)란 여섯가지 안팎의 기관 (六處) 현상을 말한다. 각 기관인 안이비설신의와 그 기관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 각 기관과 기관의 대상에 의해 생겨나는 번뇌를 말한다. 7각지(七覺支)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라는 뜻으로, 염각지(念覺支), 택법각지(擇法覺支), 정진각지(精進覺支), 희각지(喜覺支), 경안각지(輕安覺支), 정각지(定覺支), 평등각지(平等覺支)를 말한다. 4성제(四聖諦)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고집멸도를 말한다. 4성제는 특히 불교에서 가르치는 주요한 진리(현상의 이치)로서 궁극적으로 4념처 명상에서 체험적으로 깨달아야 할 대상이다.
번역어
편집4념처의 영문 번역어와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신념처(身念處): mindfulness of the body - 몸을 알아차림, 또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
- 수념처(受念處): mindfulness of feelings or sensations - 느낌 또는 감각을 알아차림, 또는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
- 심념처(心念處): mindfulness of mind or consciousness - 마음 또는 의식을 알아차림, 또는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
- 법념처(法念處): mindfulness of dhammās - 법을 알아차림, 또는 법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
경론별 설명
편집디가 니까야의 대념처경
편집상좌부 불교의 대표적인 4념처 관련 경전인 《디가 니까야》 제22경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satipaṭṭhāna Sutta)에서 고타마 붓다는 신념처를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무는 것, 수념처를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무는 것, 심념처를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무는 것, 법념처를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 |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히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
” |
— 각묵스님 옮김(2015) 《디가 니까야》 제2권 제22경 〈대념처경〉 초기불전연구원. pp.492~495.
|
중아함경의 염처경
편집고타마 붓다는 《중아함경》 제24권 제98경 〈염처경〉에서 신념처를 몸을 몸 그대로 관하는 것[觀身如身], 수념처를 느낌을 느낌 그대로 관하는 것[觀覺如覺], 심념처를 마음을 마음 그대로 관하는 것[觀心如心], 법념처를 법을 법 그대로 관하는 것[觀法如法]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 |
T01n0026_p0582b09║爾時,世尊告諸比丘:「有一道淨 |
” |
별역잡아함경 제102경
편집《별역잡아함경》 제5권 〈제102경〉에서 고타마 붓다는 4념처에 대해 "몸을 관찰하는 염처[觀身念處], 느낌을 관찰하는 염처[觀受念處], 마음을 관찰하는 염처[觀心念處], 법을 관찰하는 염처[觀法念處]"라고 하여 《디가 니까야》의 〈대념처경〉과 《중아함경》의 〈염처경〉과 같은 뜻으로 정의하고 있다.
“ |
T02n0100_p0410b10║如是我聞: 一時,佛在優樓頻螺聚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오직 하나의 도가 능히 중생을 청정하게 해서 괴로움을 여의게 할 수 있고, 또한 좋지 못한 나쁜 업을 없애서 바른 법의 이익을 얻게 할 수 있다. 이 법이란 곧 4념처(念處)를 말한다. 무엇을 4념처라고 하는가? 몸을 관찰하는 염처[觀身念處], 느낌을 관찰하는 염처[觀受念處], 마음을 관찰하는 염처[觀心念處], 법을 관찰하는 염처[觀法念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4념처를 닦지 않으면 성현의 법을 멀리한 것이고, 거룩한 도를 멀리한 것이다. 거룩한 도를 멀리한다면 곧 감로(甘露)를 멀리 여의는 것이며, 만일 감로를 멀리 여읜다면 곧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과 근심 · 슬픔 · 괴로움을 면하지 못하리니,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끝내 온갖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만일 4념처를 닦는다면 곧 성현의 법을 가까이하는 것이며, 성현의 법을 가까이하면 곧 성현의 도를 가까이하는 것이며, 성현의 도를 가까이하면 곧 감로의 법을 가까이하는 것이며, 감로의 법을 가까이하면 곧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과 근심 · 슬픔과 괴로움을 면하게 될 것이며,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과 근심 · 슬픔 · 괴로움을 면한다면 이런 사람에 대해서는 곧 고통을 여읜다고 말한다.’ |
” |
불설선행삼십칠품경
편집《불설선행삼십칠품경》(佛說禪行三十七品經)에서는 4념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하고 있다.
- 신념처는 자신의 몸 · 다른 사람의 몸 · 자신과 다른 사람의 몸을 수동적 주의집중으로 알아차려 세간 즉 3계가 무상하고 무아임을 깨닫는 것이다.
- 수념처는 자신의 느낌 · 다른 사람의 느낌 · 자신과 다른 사람의 느낌을 수동적 주의집중으로 알아차려 세간 즉 3계가 무상하고 무아임을 깨닫는 것이다.
- 심념처는 자신의 마음 · 다른 사람의 마음 · 자신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수동적 주의집중으로 알아차려 세간 즉 3계가 무상하고 무아임을 깨닫는 것이다.
- 법념처는 자신의 법 · 다른 사람의 법 · 자신과 다른 사람의 법을 수동적 주의집중으로 알아차려 세간 즉 3계가 무상하고 무아임을 깨닫는 것이다.
“ |
T15n0604_p0180c11║「諸比丘!若能彈指間,惟行自身身止 |
” |
대지도론
편집용수의 《대지도론》 제19권에 따르면, 4념처를 수행하는 목적은 4전도(四顛倒)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즉, 아직 견도(見道)에 들지 못한 범부의 상태일 때 일으키는, 부정한 법에 대하여 깨끗하다는 뒤바뀐 생각[淨顛倒]을 일으키는 것,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는 뒤바뀐 생각[樂顛倒]을 일으키는 것, 무상함에 대하여 항상하다는 뒤바뀐 생각[常顛倒]을 일으키는 것, 나가 없는데 대하여 나라는 뒤바뀐 생각[我顛倒]을 일으키는 것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23][24][25][26]
신념처는 정전도(淨顛倒)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고, 수념처는 낙전도(樂顛倒)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고, 심념처는 상전도(常顛倒)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고, 법념처는 아전도(我顛倒)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25][26]
달리 말해, 몸 · 느낌 · 마음 · 법의 각각이 부정함[不淨] · 괴로움[苦] · 무상함[無常] · 나 없음[無我]의 성질을 다 지니고 있지만, 몸은 부정한 것이라고 관하고[觀身不淨], 느낌은 괴로움이라고 관하고[觀受是苦], 마음은 무상하다고 관하고[觀心無常], 법 즉 현상과 존재는 무아라고 관한다[觀法無我]. 즉, 몸을 대상으로 하는 신념처에서는 부정함을 많이 관하고, 느낌을 대상으로 하는 수념처에서는 괴로움을 많이 관하고,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심념처에서는 무상함을 많이 관하고, 법 즉 현상과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법념처에서는 나 없음을 많이 관한다.[27][28]
신념처는 갖가지 구체적인 이치 또는 논리에 근거하여, 몸이 부정(不淨)하고 무상(無常)하고 괴롭고[苦] 공(空)하고 나 없다[無我]고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관찰하여 아는 것이다.[29][30]
수념처는 갖가지 구체적인 이치 또는 논리에 근거하여, "세간"(출세간이 아님)의 즐거운 느낌[樂受]을 괴롭다고 관찰하고, 괴로운 느낌[苦受]을 몸에 박혀 있어 시급히 빼내야 하는 화살과 같다고 관찰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을 무상하여 무너지는 특징 또는 성질을 가진 것이라고 관찰하고, 그리하여 세간의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는 (참된 즐거움이 아닌 것임을 알기에) 욕심의 집착을 내지 않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는 (성낼 겨를도 없이 그 화살을 빼내는 일에 집중하므로) 성냄을 일으키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는 (그러한 일시적인 평온을 열반 즉 진정한 해결 상태라고 생각하는) 우치를 일으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31][32]
심념처는 갖가지 구체적인 이치 또는 논리에 근거하여, 한량없는 이유 때문에 마음이 무상한 줄을 관찰하여 아는 것이다.[33][34]
법념처는 갖가지 구체적인 이치 또는 논리에 근거하여, 모든 법이 갖가지 인연의 화합에 의해 생겨난 것이어서 나라고 이름 지을 만한 실제의 법이 없다는 것을 관찰하여 아는 것이다.[35][36]
또한,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대승의 수행자, 즉, 보살은 더 나아가는데 이것을 대승의 4념처, 즉, 보살의 신념처, 보살의 수념처, 보살의 심념처, 보살의 법념처라고 한다.
보살의 신념처는 갖가지 구체적인 이치 또는 논리에 근거하여 몸의 실상이 무상(無相) · 부작원(不作願) · 무작(無作) · 무가취(無可取: 잡을 수 없음) · 무생(無生)임을 관찰할 때, 번뇌에 오염된 모든 욕망[染欲]과 집착을 떠나서 마음이 항상 념(念: 수동적 주의집중)을 묶어 몸[身]에 두고[處, 住] 이들의 관점에서 몸을 따라 살피는 것이다.[37][38][39][40][41][42]
보살의 수념처는 갖가지 구체적인 이치 또는 논리에 근거하여 3세의 모든 느낌이 공(空) · 무상(無常) · 무작(無作) · 무생(無生)임을 관찰하여 해탈문(解脫門)과 불생문(不生門)에 들어가고, 이와 같이 알고 나서는 마음을 대상에 묶어둔 상태에서 · 괴로움 · 즐거움 ·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느낌이 오면 마음은 받아들이거나 집착하지도 않으며 짓지도 의지하지도 않는 것이다.
보살의 심념처는 마음이 생(生) · 주(住) · 멸(滅)의 생멸하는 특징 또는 성질을 가진 것임을 관찰하여 아는 것이다. 나아가, 갖가지 구체적인 이치 또는 논리에 근거하여, 마음이 공(空) · 무아(無我) · 무아소(無我所) · 무상(無常) · 무실(無實) · 무생(無生)임을 관찰하여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관찰에 의거하여 마음의 생멸하는 특징 또는 성질을 관찰하면서도 실제의 생멸하는 법을 얻지 않으며, 더러움[垢]과 깨끗함[淨]을 분별치 않으므로 마음의 청정[心清淨]을 얻는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객진번뇌[客煩惱]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43][44]
보살의 법념처는 일체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자성이 없으니, 진실로 공(空)이고, 진실로 공인 까닭에 특징 또는 성질[相]이 없고, 특징 또는 성질이 없는 까닭에 무작(無作: 지음이 없음)이고, 무작인 까닭에 법의 생(生)과 주(住)와 멸(滅)을 볼 수 없다고 관하여 무생법인의 문[無生法忍門]과 무상문(無相門)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렇게 관찰할 때 마음을 대상 가운데 묶어두어 모든 법의 특징 또는 성질을 수순하되 몸 · 느낌 · 마음 · 법의 네 가지 법이 처할 바가 없는[無處所] 줄 아는 것이다.[45][46]
좌선삼매경
편집신념처는 몸은 인연따라 생긴 것이기 때문에 무상(無常)하고, 또한 몸은 갖가지로 괴롭기 때문에 고(苦)이고, 또한 몸에는 36가지 물건[三十六物]이 있기 때문에 부정(不淨)하고, 자재(自在)하지 않기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관찰하는 것이다.[47][48]
신념처에서 밝힌 바와 같이 몸의 실상이 무상(無常) · 고(苦) · 부정(不淨) · 무아(無我)임에도 불구하고 전도된 견해를 일으켜 몸에 집착하는 것은 몸으로 느끼는 즐거운 느낌[樂痛 = 樂受]을 애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즐거운 느낌[樂痛 = 樂受]이 '진실로 얻을 수 없는 것[實不可得]'이라는 것을 관해야만 한다. 즉, 즐거운 느낌이란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다'는 것을, 달리 말하면, '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는 것을 관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을 수념처라 한다.[49][50]
마음은 허깨비와 같고 요술과 같으니, 현재의 마음으로 과거의 마음을 관하면 혹은 괴로움이고, 혹은 즐거움이며, 혹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마음은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욕심이 있든 욕심이 없든 역시 이와 같아서,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안의 마음을 관하든 밖의 마음을 관하든, 아니면 안팎의 마음을 관하든 역시 이와 같다고 관찰하는 것을 심념처(心念處)라 한다.[51][52]
앞의 신념처 · 수념처 · 심념처에서 몸과 느낌과 마음이 '얻을 수 없는 것[不可得]'임을 관하였는데, 즉, 실체가 없음을, 즉, 주인이 없음을, 즉 공임을 관하였는데, 이제 4념처 전체를 총괄하여 관하여도 주인을 얻을 수 없으며 개별로 관하여도 주인을 얻을 수 없다.[53][54] 이와 같이 두루 주인이 없음을 관하면, 일체의 존재는 모두가 공이며 자재하지 못해서, 인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생기고 인연이 무너지기 때문에 없어진다. 이와 같이 인연이 화합하여 법이 되니,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을 법념처(法念處)라 한다.[55][56]
위의 4념처 각각의 관찰의 근거가 되는 이치 또는 논리가 《좌선삼매경》에 기술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심념처의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4념처 모두에 대한 관찰 근거로서의 이치 또는 논리는 "사념처 (좌선삼매경)" 문서에 실려 있다.
- 마음 즉 6식(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은 무상(無常)하여, 인연을 쫓아 생겼다가 멸하는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등류 상속하여 생겨나기[相似生] 때문에, 이를 알지 못하는 전도된 인식으로, 항상하는 하나의 존재가 있다고 여겨 '마음'이라고 이름붙인 것일 뿐이다. 본래 없다가 단지 지금 있는 것[本無今有 = 空卽是色]이고 지금의 있음이 지나면 없음으로 돌아가는 것[已有還無 = 色卽是空]이다. 그러므로 무상하다.[57][58]
- 마음 즉 6식의 본성을 관찰해 보면 공(空)임을 알게 되니, 무엇을 공이라 하는가? 공이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을 말한다.[57][58]
- 눈이 있고, 물질이 있고, 눈이 볼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념(念)이 있고, 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서 이와 같은 것들이 다 화합할 때 비로소 안식이 생긴다. 마치 해가 돋보기를 사랑함이 있고, 해가 있고, 돋보기가 있고, 마른 풀이 있고, 쇠똥이 있어서 이 모든 인연이 화합하여 거기에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다. 하나하나를 미루어 찾으면 불은 얻을 수 없지만, 모든 인연 즉 조건이 합하여 불이 있다.[57][58]
- 안식도 이 불과 같다. 따라서, 안식은 눈에도 머물지 않고, 물질에도 머물지 않으며, 눈과 물질의 중간에도 머물지 않으므로(즉, 중간에 머문다는 말은 반은 눈에 있고 반은 물질에 있다는 말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미 눈에도 머물지 않고 물질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했으니, 다시 반은 눈에 있고 반은 물질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항상 머물러 있는 곳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허깨비와 같고 요술과 같다.[51][52]
- 현재의 마음 즉 6식으로 과거의 마음 즉 6식을 관하면 혹은 괴로움이고, 혹은 즐거움이며, 혹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51][52]
- 마음 즉 6식은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51][52]
- 욕심이 있는 마음 즉 6식이건 욕심이 없는 마음이건 역시 이와 같아서,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51][52]
- 안의 마음, 즉, 나의 마음 즉 6식을 관해 보아도, 역시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51][52]
- 밖의 마음, 즉, 다른 사람의 마음 즉 6식을 관해 보아도, 역시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51][52]
- 안팎의 마음, 즉, 나의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 즉, 집단의 마음 즉 6식을 관해 보아도, 역시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51][52]
대반열반경후분
편집“ |
T12n0377_p0901a12║爾時阿難聞佛語已,身心戰動,情識恾然,悲 |
” |
종경록
편집선종 법안종(法眼宗)의 연수(904~975)의 《종경록》 제39권에서는 《대반열반경후분》 상권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여 4념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취지로 설명하고 있다.
- 몸의 성질과 모습이 허공과 같다고 관하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신념처라고 한다.
- 몸에 어떤 느낌이 있을 때 이 느낌이 몸이나 몸 바깥에 있지도 않고, 중간에 머물지도 않음을 관하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수념처라고 한다.
-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은 단지 고정된 개념으로 명자라는 사실을 관하는 것이니, 이 명자의 성품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름하여 심념처라고 한다.
- 중생의 마음에 일어나는 일체 법은 좋은 법도 좋지 않는 법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관하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법념처라고 한다.
“ |
T48n2016_p0645a26║夫覺王明勅大教指歸。末法比丘。須於四念 |
” |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구마라집 한역(T.614).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하권. 대정신수대장경. T15, No. 614, CBETA:
T15n0614_p0279a23║若行者得法念止,厭世間空老病
T15n0614_p0279a24║死法,都無少許常樂我淨,我於此空法復何
T15n0614_p0279a25║所求?應當入涅槃最善法中住。建精進力,得
T15n0614_p0279a26║深舍摩陀故(深舍摩陀者,住心一處名也,此土無是名)。是時得深舍摩
T15n0614_p0279a27║陀,住第四法念止中,觀諸法相,皆苦無樂,無
T15n0614_p0279a28║樂是實,餘者妄語。苦因愛等諸煩惱及業,
T15n0614_p0279a29║是非天、非時、非塵等種種妄語中生,是煩惱
T15n0614_p0279b01║及業出生,此苦是苦。入涅槃時一切滅盡 - ↑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K.991, T.614). 《좌선삼매경》 하권:
만일 수행자가 법념지를 얻는다면 세간의 공(空)ㆍ늙음ㆍ병듦ㆍ죽음의 법을 싫어하여 도무지 조금도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공한 법에서 다시 무엇을 구하는가?
마땅히 열반의 최선의 법 가운데 들어가서 머물러야 하며, 정진의 힘을 세워서 깊은 사마타(舍摩陀)를 얻는다.깊은 사마타라는 것은 마음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적절히 표현할 이름이 없다. 이때 깊은 사마타를 얻어서 제4의 법념지 가운데 머문다.
모든 존재[諸法]의 모습을 관하건대 모든 것이 괴로움이어서 즐거움이 없으며, 즐거움이 없는 것이 진실이요 나머지는 거짓말이니, 괴로움은 애착 등의 여러 가지 번뇌와 업에서 연유한다. 이것은 하늘이 아니며, 시간이 아니고 티끌 등이 아니다.{티끌이 아니라는 등의} 이와 같은 갖가지 거짓말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갖가지 거짓말 속에서 생기니,} 이 번뇌와 업이 이 괴로움을 발생시킨다. 이 괴로움은 열반에 들어갔을 때 일체가 남김없이 사라진다. - ↑ "坐禪三昧經(좌선삼매경)" , 운허. 《불교사전》:
坐禪三昧經(좌선삼매경)
2권. K-991, T-614. 인도의 승가라찰 지음. 요진(姚秦)시대에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이 402년에서 407년 사이에 장안(長安)에서 번역하였다. 줄여서 『선경(禪經)』이라 하고, 별칭으로 『보살선법경(菩薩禪法經)』ㆍ『아란야습선법(阿蘭若習禪法)』ㆍ『좌선삼매법문경(坐禪三昧法門經)』ㆍ『선법요(禪法要)』라고도 한다. 승우의 『출삼장기집』에 의하면, 이 불전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대승의 선관(禪觀)을 말한 경이다. - ↑ "坐禪三昧經" , 星雲. 《佛光大辭典》(불광대사전) 3판:
坐禪三昧經
梵名 Dhyāna-niṣṭhita-samādhi-dharmaparyāya-sūtra。凡二卷(或三卷)。姚秦弘始四年(402)鳩摩羅什於長安譯出。弘始九年復校。又稱坐禪三昧法門經、菩薩禪法經、阿蘭若習禪法、禪法要。略稱禪經。收於大正藏第十五冊。此經係抄集諸家禪要,闡明五門禪之法,並論大小二乘綜合之禪觀。據僧叡關中出禪經序,諸家係指鳩摩羅陀、馬鳴菩薩、婆須蜜、僧伽羅叉、漚波崛、僧伽斯那、勒比丘等諸師。
本經與覺賢在廬山譯出之達摩多羅禪經相同,論說大小二乘綜合性之禪觀。未譯出以前,我國佛教初期之禪觀,均係根據後漢安世高所譯之禪經;其後由於道安之倡導,北方前秦與後秦之禪觀始漸興隆,並盛行實修方法,然均不出小乘禪之領域。鳩摩羅什譯出本經後,大乘佛教與小乘禪乃至大乘禪與小乘禪之關係明確。故天台止觀之成立、我國禪宗之誕生,本經促發之功實不可滅。〔出三藏記集卷二、卷九、開元釋教錄卷四、中國佛教初期之禪觀(橫超慧日)〕p3576 - ↑ “Dhamma Talks (((((0))))) Attaining PEACE with KNOWING & SEEING a Handful of Leaves”. 2024년 4월 11일에 확인함.
-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편저(2005). 《수행법 연구》 pp. 740-741
-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편저(2005). 《수행법 연구》 p. 741
-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편저(2005). 《수행법 연구》 pp. 741-742
-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편저(2005). 《수행법 연구》 p. 741에서는 수행법의 이 순서에서 '산란함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경전의 내용을 보면 경전에서 이 부분은 "위축된 마음을 위축된 마음이라 알아차린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주석서에서는 위축된 마음이란 해태와 혼침에 빠진 마음, 즉, 5개 중 혼면개(惛眠蓋)에 빠진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위축됨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편집자가 정정하여 표기하였다.
-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편저(2005). 《수행법 연구》 p. 741에서는 수행법의 이 순서에서 '산란함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경전의 내용을 보면 경전에서 이 부분은 "산란한 마음을 산란한 마음이라 알아차린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주석서에서는 산란한 마음이란 들뜸과 함께하는 마음, 즉, 5개 중 도회개(掉悔蓋)에 빠진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산란함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편집자가 정정하여 표기하였다.
-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편저(2005). 《수행법 연구》 p. 742
- ↑ For an example of a Zen master's explicit use of this type of meditation, see Nhat Hanh (2005).
- ↑ "mindful", 네이버 영영사전. 2022년 6월 17일에 확인.
Merriam Webster 사전:
mindful:
1. bearing in mind; aware
be mindful of how you use your power
2. inclined to be aware
a stirring and important book for all mindful Americans - ↑ "mindful", 네이버 영영사전. 2022년 6월 17일에 확인.
Oxford Press 사전:
mindful:
1. conscious or aware of something
I arrived home for the summer, ever mindful of my obligations to my parents
2. focusing one's awareness on the present moment, especially as part of a therapeutic or meditative technique tune in to your body and be mindful
3. [formal] [with infinitive]
inclined or willing to do something
the judge said that he was not mindful to postpone the eviction again - ↑ "mindful", 네이버 영영사전. 2022년 6월 17일에 확인.
Collins 사전:
mindful:
1. (usually postpositive and foll by of) keeping aware; heedful
mindful of your duties - ↑ (중국어) 세우 조, 현장 한역 (T.1542). 《阿毘達磨品類足論》(아비달마품류족론) 제1권. 대정신수대장경. T26, No. 1542, CBETA
念云何。謂心明記性。 - ↑ 세우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K.949, T.1542). 《아비달마품류족론》 제1권.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염(念)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분명히 기억하는 성품[明記性]이다. - ↑ 세친 조,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아비달마구사론》 제23권
그렇다면 4념주의 본질[體]은 무엇인가?
이러한 4념주의 본질에는 각기 세 가지가 있으니, 자성(自性)과 상잡(相雜)과 소연(所緣)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자성염주(즉 염주 그 자체)는 혜를 본질로 하는데, 이러한 혜에도 역시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문(聞) 등에 의해 성취되는 혜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역시 3종 염주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잡염주는 이러한 혜와 그 밖의 구유하는 법을 본질로 하며, 소연염주는 이러한 세 가지 혜의 소연이 되는 제법을 본질로 한다.5)
5) 자성염주의 본질은 문 · 사 · 수소성의 세 가지 혜로서, 4념주는 각기 이러한 혜를 본질로 하여 성립하기 때문에 역시 세 가지 종류로 분류된다. 상잡염주란 혜와 상응 · 구유하는 심 · 심소법과 득(得)과 4상을 말하며, 소연염주란 혜에 의해 관찰되는 몸 · 수 · 마음 · 법 등을 말한다. 즉 염주는 그것을 소연으로 하여 성립하였기 때문이다.
자성염주의 본질은 바로 혜로서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안 것인가?
경에서 설하기를, “몸에 대해 순신관(循身觀, kāyānupāśin:몸을 쫓아 관하는 것)으로 머무는 것을 신념주라고 이름하며, 그 밖의 세 가지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6) 즉 ‘쫓아서 관하는 것[循觀, anupaśin]’이라고 이름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혜 자체에 근거한 것이니, 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몸을] 쫓아서 관하는 관법의 작용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6)『잡아함경』 권제24(대정장2, p.171상, p.상), “이른바 4념처가 있으니,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한 것인가? 몸을 몸이라고 관하는 염처이며, 지각을 지각으로, 마음을 마음으로, 법을 법으로 관하는 염처가 바로 그것이다.” 『중아함경』 권제24 「염처품」(대정장1, p.528) 참조.
어떠한 연유에서 혜에 대해 염주라고 이름한 것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러한 품류는 기억[念]이 증대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기억의 힘이 혜를 유지시켜 일어날 수 있게 한다는 뜻으로, 마치 도끼가 쐐기의 힘에 의해 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다.”7)
7) 염주의 본질이 혜라면 왜 ‘혜주(慧住)’라고 이름하지 않고 ‘염주(念住)’라고 이름한 것인가 하면, ‘염’이 증대하여 그 힘에 의해 혜가 소연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주 세친은 이와 반대로 염은 혜에 의해 관찰된 것만을 능히 명기(明記)하는 것으로, 혜의 힘이 ‘염’을 소연의 경계에 머물게 하기 때문에 ‘염주’라고 이름한 것이라고 하였다.(후술)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혜가 염으로 하여금 [소연에] 머물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혜에 대해 ‘염주’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이라고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니, 혜에 의해 관찰된 바에 따라 능히 명기(明記)하기 때문이다. 곧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무멸(無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능히 몸에 대해 순신관(循身觀)으로 머물 때라면, 몸을 소연으로 하는 ‘염’이 머물 수 있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8) 세존께서도 역시 설하시기를, “만약 어떤 이가 몸에 대해 순신관으로 머물 때라면, ‘염’은 바로 틀림없이 머물게 된다”고 하셨던 것이다9)
8)『잡아함경』 권제19 제535경(대정장2, p.139중). 여기서 무멸은 존자 아나율(阿那律, Aniruddha). “무엇을 일러 4념처를 즐기는 것이라고 하는가? 존자 대목건련이시여! 만약 어떤 비구가 몸을 몸으로 관하는 염처[身身觀念處]에서 마음이 몸을 소연으로 삼아 정념(正念)으로 머물어 조복받고 지식(止息) 적정(寂靜)하여 한 마음이 증진(增進)하면, 이와 마찬가지로 수ㆍ심ㆍ법념처에서 정념으로 머물어 조복받고 지식 적정하여 한 마음이 증진하면 이를 4념처를 즐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본론의 뜻은 혜의 심소가 순신관에 의해 몸을 관찰할 때 동시에 염의 심소가 혜의 심소가 관찰한 바를 기억하여 그 소연(즉 몸)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9)『잡아함경』 권제11 제281경(대정장2, p.77하), “어떻게 4념처를 닦아 7각분의 원만함을 획득하는 것인가? 목건련 비구는 이와 같이 몸에 따라 신관(身觀)에 머무니, 그는 몸에 따라 신관에 머물 때 기억[念]을 모아 안주하여 결코 잊지 않았다.(云何修四念處得七覺分滿足? 目揵連比丘如是順身身觀住, 彼順身身觀住時 攝念安住不忘.)” - ↑ (한국어) 대림스님 옮김(2014) 《맛지마 니까야》 제4권 제118경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경〉 초기불전연구원. pp.183~184.
18.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133)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③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134)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④ '몸의 작용[身行]135)136)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133) '들이쉬면서는'은 assasanto를 옮긴 것인데 이 단어는 assasati(ā+✓śvas, to breathe)의 현재 분사이다. '길게 들이쉬면서는'은 길게 들이쉴 때라는 뜻으로 길게 들이쉬어야겠다.'거나 '짧게 쉬어야겠다.'거나 하는 그런 일체의 의도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길게 들이쉴 때는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안다는 뜻이다. 『청정도론』 (VIII.168)은 『무애해도』의 설명을 인용히여 '이렇게 꿰뚫어 알 때 열의(chanda)가 일어나고, 또한 환희(pāmojja)가 일어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Ps.i.177)
135) 여기서 '몸의 작용[身行,kãya-saṅkhāra]'은 들숨날숨을 말한다. 『상윳따 니까야』제4권 까마부 경」2(S41:6/iv.293) §5에서 까마부 존자는 찟따 장자에게 “장자여,들숨날숨은 몸에 속하는 것이고 이런 법들은 몸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들숨날숨은 몸의 작용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본서 제2권 「교리문답의 짧은 경」(M44) §14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청정도론』의 복주서인『빠라맛타 만주사』도 “여기서 '몸의 작용[身行,kāya-saṅkhāra]'이란 들숨날숨을 말한다. 비록 이것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지만 그것의 존재가 몸에 묶여 있고 몸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몸의 작용이라 부른다."(Pm. 220)라고 설명하고 있다.
『상윳따 니까야』 제3권 「앗사지 경」 (S22:88) §7의 주해도 참조할 것.
136) '신행(身行)'으로 한역되는 kãya-saṅkhāra를 본서 전체에서 역자는 크게 두 가지로 옮기고 있다. 여기서처럼 '몸의 작용'으로도 옮기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몸의 의도적 행위'로도 옮긴다. - ↑ 세친 조, 현장 한역(T.1558).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제22권. 대정신수대장경. T29, No. 1558, CBETA:
T29n1558_p0118a23║數
T29n1558_p0118a24║謂繫心緣入出息不作加行。放捨身心唯
T29n1558_p0118a25║念憶持入出息數。從一至十不減不增。
T29n1558_p0118a26║恐心於現。極聚散故 - ↑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K.955, T.1558). 《아비달마구사론》 제22권:
‘수(數, ganaṇā)’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마음을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여 어떠한 가행도 짓지 않고, 몸과 마음을 편안히 놓아둔 채 오로지 들숨과 날숨만을 생각하고 기억하여 하나에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헤아리는 것[數]을 말하니, 마음이 경계(즉 입식ㆍ출식)에 너무 매이거나 흩어지는 것을 염려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 ↑ Gelong Lodrö Sangpo, Louis de La Vallee Poussin, Xuanzang, Vasubandhu (2012). 《Abhidharmakośa-Bhāṣya of Vasubandhu: The Treasury of the Abhidharma and its (Auto) commentary》 Vol. 3. p.1904. 한자는 편집자가 추가.
1. Counting (gaṇanā 數). - One fixes one's thought 繫心 on 緣 in-breathing and out-breathing [āśvasapraśvāsa 入出息], without effortful exertion or instigation (abhisaṃskāra 加行) 不作加行, leaving 捨 the body and thought 身心 as they are;148 through mere mindfulness [smṛti 念] 唯念憶持入出息, one counts 數 from one up to ten 從一至十. <155> Through fear of 恐 being too brief (abhisaṃkṣepa) for thought 心於現 and of distracting (vikṣepa 散) (vii. 11) thought 極聚散, one does not [count] below ten or above ten 不減不增.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T.1509).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9권. 대정신수대장경.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198a21║ 有眾生多念,亂心顛倒故,著此身、受、心、
T25n1509_p0198a22║ 法中作邪行,為是人故說四念處。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중생은 생각이 많고 어지러운 마음으로 뒤바뀌었기에 이 몸ㆍ느낌ㆍ마음ㆍ법에 집착되어 삿된 행을 짓나니, 이런 사람을 위하는 까닭에 4념처를 설한다. - ↑ 가 나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T.1509).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9권. 대정신수대장경.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198c14║ 何以
T25n1509_p0198c15║ 故?凡夫人未入道時,是四法中,邪行起四
T25n1509_p0198c16║ 顛倒:諸不淨法中淨顛倒,苦中樂顛倒,無常
T25n1509_p0198c17║ 中常顛倒,無我中我顛倒。破是四顛倒故,
T25n1509_p0198c18║ 說是四念處;破淨倒故說身念處,破樂倒
T25n1509_p0198c19║ 故說受念處,破常倒故說心念處,破我倒
T25n1509_p0198c20║ 故說法念處。以是故說四,不少不多。 - ↑ 가 나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그것은 왜냐하면 범부가 아직 도에 들지 않았을 때 이 네 가지 법에서 삿된 행을 하거나 네 가지 뒤바뀐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든 부정한 법에 대하여 깨끗하다는 뒤바뀐 생각[淨顛倒]을 일으키며,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는 뒤바뀐 생각[樂顛倒], 무상함에 대하여 항상하다는 뒤바뀐 생각[常顛倒], 나가 없는데 대하여 나라는 뒤바뀐 생각[我顛倒]을 일으킨다.
이런 네 가지 뒤바뀜[四顛倒]을 깨뜨리기 위한 까닭에 이 4념처를 말하는 것이다.
깨끗하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신념처(身念處)를 말하고, 즐겁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수념처(受念處)를 말하고, 항상하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심념처(心念處)를 말하고, 나가 있다는 뒤바뀐 생각을 깨뜨리려는 까닭에 법념처(法念處)를 말한다.
이런 까닭에 넷을 말하니, 이는 모자라지도 많지도 않은 것이다.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T.1509).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9권. 대정신수대장경.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198c11║ 觀四法四
T25n1509_p0198c12║ 種:觀身不淨,觀受是苦,觀心無常,觀法
T25n1509_p0198c13║ 無我。是四法雖各有四種,身應多觀不淨,
T25n1509_p0198c14║ 受多觀苦,心多觀無常,法多觀無我。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네 가지 법을 네 종류로 관찰하니, 곧 몸이 부정하다고 관찰하고, 느낌은 괴롭다고 관찰하고, 마음은 무상하다고 관찰하고, 법은 나가 없다고 관찰한다.
이 네 가지 법이 각각 네 가지 법을 갖추고 있으나, 몸에서는 부정을 많이 관하고, 느낌에서는 괴로움을 많이 관하고, 마음에서는 무상함을 많이 관하고, 법에서는 나 없음을 많이 관해야 한다.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T.1509).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9권. 대정신수대장경.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199c02║ 行者思惟是身,如
T25n1509_p0199c03║ 是不淨、無常、苦、空、無我,有如是等無量過
T25n1509_p0199c04║ 惡。如是等種種觀身,是名身念處。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수행자는 이 몸이 이렇게 부정하고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다고 사유한다. 이러한 한량없는 허물이 있으니, 이러한 갖가지 방법으로 몸을 관찰하는 것을 신념처라 한다.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T.1509).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9권. 대정신수대장경.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0a16║ 如是種種
T25n1509_p0200a17║ 因緣,觀世間樂受是苦,觀苦受如箭,不苦
T25n1509_p0200a18║ 不樂受觀無常壞敗相;如是則樂受中不
T25n1509_p0200a19║ 生欲著,苦受中不生恚,不苦不樂受中不
T25n1509_p0200a20║ 生愚癡。是名受念處。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세간의 즐거운 느낌을 괴롭다고 관찰하고, 괴로운 느낌은 화살과 같다고 관찰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여 무너지는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라고 관찰한다.
이와 같다면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는 욕심의 집착을 내지 않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는 성냄을 일으키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는 우치를 일으키지 않게 된다. 이것이 수념처(受念處)이다.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T.1509).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9권. 대정신수대장경.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0b25║ 如是無量因緣故,知心無常,是名
T25n1509_p0200b26║ 心念處。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이와 같은 한량없는 이유{인연} 때문에 마음이 무상한 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심념처(心念處)이다.
如是無量因緣故,知心無常,是名心念處。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T.1509).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9권. 대정신수대장경.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0c27║ 如是等種
T25n1509_p0200c28║ 種因緣,觀諸法和合因緣生,無有實法有
T25n1509_p0200c29║ 我,是名法念處。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이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모든 법이 화합의 인연으로 생겨난 것이어서 나라고 이름 지을 만한 실제의 법이 없다고 관찰하니, 이것을 법념처(法念處)라 한다.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T.1509).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9권. 대정신수대장경.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3b27║ 循
T25n1509_p0203b28║ 身觀是身無我、無我所故空,空故無男女
T25n1509_p0203b29║ 等諸相,無相故不作願。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몸을 따라 관찰[循身觀]해보면, 이 몸은 나[我]가 없고, 나가 없음 즉 무아(無我)이기에 실(實)이 없고, 실이 없음 즉 공[空]하기에 남녀 등의 모든 특정할 수 있는 특징 또는 성질{모양}이 없고, 특정할 수 있는 특징 또는 성질이 없음 즉 무상(無相)이기에 이 몸은 부작원(不作願)이다, 즉, 짓고자 하는 (자신의 또는 타자의) 원에 의한 존재 즉 짓고자 하는 원이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不作願].
{몸을 따라 관찰[循身觀]해보면, 이 몸은 나[我]가 없고, 무아(無我)이기에 실이 없고, 공[空]하기에 남녀 등의 모든 특징 또는 성질{모양}이 없고, 무상(無相)이기에 이 몸은 짓고자 하는 원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不作願].}{몸을 두루 관찰하건대 이 몸은 나 없고, 나 없기에 공하고, 공하기에 남녀 등의 모든 특징 또는 성질{모양}이 없고, 특징 또는 성질{모양}이 없기에 원(願)을 짓지 않는다.}’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T.1509).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9권. 대정신수대장경.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3c04║ 如是思惟,知是身從本以來無有
T25n1509_p0203c05║ 生相,知是身無相無可取。無生故無相,無
T25n1509_p0203c06║ 相故無生,但誑凡夫故名為身。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이와 같이 사유하여, 이 몸은 본래부터 생상(生相)이 없다는 것을 즉 나게 하는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다는 것을 즉 무생(無生)이라는 것을 알고, 이 몸은 무상(無相)이며 무가취(無可取: 잡을 수 없음)라는 것을 안다. 무생(無生)이므로 무상(無相)이며 무상이므로 무생이건만 다만 속임을 당한[誑] 범부인 까닭에 [실재하는] 몸이라 이름한다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사유한다면 이 몸은 본래부터 나는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음을 아나니, 이 몸은 무상(無相)이며 잡을 수 없다.
무생이기에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고,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기에 무생이거늘 오직 어리석은 범부인 까닭에 일컬어 몸이라 함을 안다.}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T.1509).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9권. 대정신수대장경.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3c06║ 菩薩如是
T25n1509_p0203c07║ 觀身實相時,離諸染欲著,心常繫念在身。
T25n1509_p0203c08║ 循身觀如是,名為菩薩身念處。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보살이 이와 같이 몸의 실상을 관찰할 때, 번뇌에 오염된 모든 욕망[染欲]과 집착을 떠나서 마음이 항상 생각[念]을 묶어 몸에 두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몸을 따라 살피는 것을 일컬어 보살의 신념처라고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몸의 실상을 관찰할 때, 번뇌에 오염된 모든 욕망[染欲]과 집착을 떠나서 항상 마음을 묶어 몸에 두고 이와 같이 몸을 따라 살피는 것을 일컬어 보살의 신념처라고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몸의 실상을 관찰할 때 모든 물들은 욕망[染欲]과 집착심을 여의고 항상 마음을 묶어 몸에 두고 몸을 두루 살피니, 이와 같음을 일컬어 보살의 신념처라고 한다.}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T.1509).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9권. 대정신수대장경.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3c21║ 菩薩云何觀心念處?
T25n1509_p0203c21║ 菩薩觀內心,
T25n1509_p0203c22║ 是內心有三相:生、住、滅;作是念:是心無所
T25n1509_p0203c23║ 從來,滅亦無所至,但從內外因緣和合生。
T25n1509_p0203c24║ 是心無有定實相,亦無實生、住、滅,亦不在
T25n1509_p0203c25║ 過去、未來、現在世中。是心不在內、不在外、
T25n1509_p0203c26║ 不在中間。是心亦無性無相;亦無生者,無
T25n1509_p0203c27║ 使生者。外有種種雜六塵因緣,內有顛倒
T25n1509_p0203c28║ 心相生滅相續故,強名為心。如是心中實
T25n1509_p0203c29║ 心相不可得。是心性不生不滅,常是淨相,客
T25n1509_p0204a01║ 煩惱相著故,名為不淨心。心不自知,何以
T25n1509_p0204a02║ 故?是心,心相空故。是心本末無有實法,是心
T25n1509_p0204a03║ 與諸法無合無散,亦無前際、後際、中際,無
T25n1509_p0204a04║ 色、無形、無對,但顛倒虛誑生。是心空,無我、無
T25n1509_p0204a05║ 我所,無常無實。是名隨順心觀。知心相無
T25n1509_p0204a06║ 生,入無生法中。何以故?是心無生,無性無相,
T25n1509_p0204a07║ 智者能知。智者雖觀是心生滅相,亦不得
T25n1509_p0204a08║ 實生滅法,不分別垢淨而得心清淨。以是
T25n1509_p0204a09║ 心清淨故,不為客煩惱所染。如是等觀
T25n1509_p0204a10║ 內心。觀外心、觀內外心亦如是。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보살은 어떻게 심념처(心念處)를 관찰하는가?
보살은 먼저 안의 마음을 관찰하여 안 마음에 생(生)ㆍ주(住)ㆍ멸(滅)의 세 가지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있음을 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마음은 온 곳도 없고, 멸해도 가는 곳도 없으며, 오직 안팎의 인연이 화합해서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은 고정된 실제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고, 실제의 생ㆍ주ㆍ멸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과거의 세상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미래의 세상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현재의 세상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이 마음은 안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밖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중간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이 마음은 성품이 없고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다. 또한 이 마음은 스스로 낳는 이도 없고 또한 낳도록 시키는 이도 없다. 밖으로는 갖가지 뒤섞인 6진(塵)의 인연이 있어서 그리고 안으로는 뒤바뀐 마음작용[心相]이 생멸하고 상속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으로 억지로 마음[心]이라 한다.’
이와 같이 마음 가운데서는 실로 마음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心相]을 얻을 수 없다.
이 마음의 성품은 생겨난다고도 말할 수 없고 소멸한다고도 말할 수 없는데 항상 깨끗한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지만 객진번뇌[客煩惱]16)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가 서로에게 들러붙었기 때문에 부정한 마음[不淨心]이 된 것이다.
마음은 자신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마음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공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근본에서나 지말에서나 실유하는 법이 아니다. 이 마음은 모든 법과 합한다고도 말할 수 없고 흩어진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시간에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무색이며, 무형이고, 무대이다. 다만 뒤바뀌고 거짓되어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마음은 공하여 무아이고, 무아소이고, 무상이고, 무실이다.
이것을 일컬어 ‘마음을 수순하는 관법’[隨順心觀]이라 한다.
마음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무생임을 알면, 즉, 생겨난다고도 말할 수 없고 소멸된다고도 말할 수 없음을 알면 무생법(無生法)에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무생이고 즉 생겨난다고도 말할 수 없고 소멸된다고도 말할 수 없고, (고정된) 성품[性]이 없고,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지혜로운 이는 능히 안다. 지혜로운 이는 비록 이 마음의 생멸하는 특징 또는 성질{모습}을 관찰하면서도 실제의 생멸하는 법을 얻지 않으며, 더러움[垢]과 깨끗함[淨]을 분별치 않으므로 마음의 청정[心清淨]을 얻는다. 이와 같이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객진번뇌[客煩惱]에 물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안의 마음을 관찰하고, 밖의 마음도 관찰한다.
안팎의 마음을 관찰함도 또한 이와 같다.
{곧 보살이 안의 마음을 관찰하건대, 이 안 마음에 세 가지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있으니, 생(生)ㆍ주(住)ㆍ멸(滅)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마음은 온 곳도 없고, 멸해도 가는 곳도 없으며, 오직 안팎의 인연이 화합해서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은 일정한 실제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고, 실제의 생ㆍ주ㆍ멸도 없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세상에 있지도 않다. 이 마음은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지 않으며, 중간에 있지도 않다. 이 마음은 성품 없고 특징 또는 성질{모습} 없으며, 또한 내는 이도 없고 나게 하는 이도 없다. 밖으로는 갖가지 뒤섞인 6진(塵)의 인연이 있고, 안으로는 뒤바뀐 생각[心想]이 생멸하고 상속하기 때문에 억지로 마음이라 한다.’
이와 같이 마음 가운데서는 실로 마음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心相]을 얻을 수 없다.
이 마음의 성품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 항상 깨끗한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거늘 객진번뇌[客煩惱]16)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에 집착되기 때문에 부정한 마음이라 한다.
마음은 스스로가 알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이 마음은 마음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공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근본이나 지말에 진실한 법이 없다. 이 마음은 모든 법과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지나간 시간ㆍ다가올 시간ㆍ현재의 시간도 없으며, 빛 없고 형상 없고 대할 수도 없다. 다만 뒤바뀐 허망에서 생긴 것이다. 이 마음은 공하여 나 없고 내 것도 없으며, 무상하고 진실됨이 없다.
이것을 일컬어 ‘마음을 수순하는 관법’이라 한다.
마음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무생임을 알면 무생법[無生法]에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남이 없고, 성품이 없고,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는 까닭이다.
지혜로운 이는 능히 아나니, 지혜로운 이는 비록 이 마음의 생멸하는 특징 또는 성질{모습}을 관찰하면서도 실제로 생멸하는 법을 얻거나 더럽고 깨끗함을 분별치 않으나 마음의 청정을 얻는다. 이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객번뇌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안의 마음을 관찰하고, 밖의 마음을 관찰한다.
안팎의 마음을 관찰함도 또한 이와 같다.}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T.1509).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9권. 대정신수대장경. T25, No. 1509, CBETA:
T25n1509_p0204a19║ 是時作是念:一切諸法因緣生故,無有
T25n1509_p0204a20║ 自性,是為實空,實空故無有相,無有相故
T25n1509_p0204a21║ 無作。無作故不見法若生若滅,住是智慧中,
T25n1509_p0204a22║ 入無生法忍門。爾時雖觀諸法生滅,亦入
T25n1509_p0204a23║ 無相門。何以故?一切法離諸相,智者之所解。
T25n1509_p0204a24║ 如是觀時,繫心緣中,隨順諸法相,不念身、
T25n1509_p0204a25║ 受、心、法,知是四法無處所。是為內法念處。 - ↑ 용수 지음,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K.549, T.1509). 《대지도론》 제19권:
이때 이렇게 생각한다.
‘일체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자성이 없으니, 이것이 진실한 공이다. 진실한 공인 까닭에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고, 특징 또는 성질{모습}이 없는 까닭에 지음이 없고, 지음이 없는 까닭에 법이 일어나거나 혹은 멸하거나 머무름을 보지 않는다.’
이러한 지혜에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문에 들어간다.
이때 비록 모든 법의 생멸을 관찰하나 또한 무상문(無相門)에도 들어가나니, 왜냐하면 일체법이 모든 특징 또는 성질{모습}을 여읨은 지혜로운 이라야 깨닫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마음을 대상 가운데 묶어두어 모든 법의 특징 또는 성질{모습}을 수순하되 몸ㆍ느낌ㆍ마음ㆍ법을 생각하지 않으며, 이 네 가지 법이 처할 바가 없는 줄 안다. 이것이 안의 법념처이다. - ↑ 구마라집 한역(T.614).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하권. 대정신수대장경. T15, No. 614, CBETA:
T15n0614_p0278c07║從因緣生故無常,種種惱故苦,身有三十六
T15n0614_p0278c08║物故不淨,以不得自在故無我。習如是觀,觀
T15n0614_p0278c09║內身、觀外身、觀內外身,習如是觀,是謂身念
T15n0614_p0278c10║止。 - ↑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K.991, T.614). 《좌선삼매경》 하권: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갖가지로 괴롭기 때문에 고(苦)이며, 몸에는 36가지 물건이 있기 때문에 부정(不淨)하며,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니, 이와 같이 관함을 익혀서 내신(內身)을 관하고 외신(外身)을 관하며, 나아가 내외신(內外身)을 관한다.
이와 같은 관법을 익히면, 이것을 일러 신념지(身念止)라고 한다. - ↑ 구마라집 한역(T.614).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하권. 대정신수대장경. T15, No. 614, CBETA:
T15n0614_p0278c10║身實相如是!何故於此,而起顛倒愛著此
T15n0614_p0278c11║身?諦思惟念,身邊樂痛,以愛樂痛故著此身,
T15n0614_p0278c12║當觀樂痛實不可得 - ↑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K.991, T.614). 《좌선삼매경》 하권:
몸의 실상(實相)이 이와 같은데,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 뒤바뀐 견해를 일으켜 이 몸을 애착하는가?
몸으로 느끼는 즐거운 느낌[樂痛 = 樂受]을 자세히 사유하고 알아차려라. 즐거운 느낌을 애착하기 때문에 이 몸에 집착하는 것이니, 마땅히 즐거운 느낌은 진실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관해야만 한다.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구마라집 한역(T.614).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하권. 대정신수대장경. T15, No. 614, CBETA:
T15n0614_p0279a07║眼識亦爾,不住眼中,亦非
T15n0614_p0279a08║色中住,不兩中間住,無有住處,亦復不無。是
T15n0614_p0279a09║故佛言:「如幻如化」。現在心觀過去心,或苦、或
T15n0614_p0279a10║樂、或不苦不樂,心各各異各各滅,有欲心、無
T15n0614_p0279a11║欲心亦如是,各各異各各滅,觀內心、觀外心、
T15n0614_p0279a12║觀內外心亦如是。是名心念止。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K.991, T.614). 《좌선삼매경》 하권:
안식도 이 불과 같다. 따라서, 안식은 눈에도 머물지 않고, 물질에도 머물지 않으며, 눈과 물질의 중간에도 머물지 않으므로, 항상 머물러 있는 곳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은 아니다.{안식도 또한 그러해서, 눈에도 머물지 않고 물질에도 머물지 않으며, 두 가지 중간에도 머물지 않고, 머무는 곳이 있지 않으며,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허깨비와 같고 요술과 같으니, 현재의 마음으로 과거의 마음을 관하면 혹은 괴로움이고, 혹은 즐거움이며, 혹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마음은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욕심이 있든 욕심이 없든 역시이와 같아서,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안의 마음을 관하든 밖의 마음을 관하든, 아니면 안팎의 마음을 관하든 역시 이와 같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심념지(心念止)라고 이름한다. - ↑ 구마라집 한역(T.614).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하권. 대정신수대장경. T15, No. 614, CBETA:
T15n0614_p0279a12║復次觀心為
T15n0614_p0279a13║屬誰?觀想、思惟、念欲等諸心相應法不相應
T15n0614_p0279a14║法,諦觀其主,主不可得。何以故?從因緣生故
T15n0614_p0279a15║無常,無常故苦,苦故不自在,不自在故無主,
T15n0614_p0279a16║無主故空。前別觀身、痛、心法不可得,今更總
T15n0614_p0279a17║觀四念止中主不可得,離此處求亦不可得。 - ↑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K.991, T.614). 《좌선삼매경》 하권:
또한 마음은 누구에 속한다고 관하는가?
상(想)ㆍ사유(思惟)ㆍ염(念)ㆍ욕(慾) 등의 온갖{여러 가지} 마음이 서로 응하는 법[心相應法]과 서로 응하지 않는 법[不相應法]을 관찰하여{관하고}, 그 주인을 자세히 찾으려고 해도{관하여도} 주인은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고, 괴로움이기 때문에 자재하지 못하며,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인이 없고, 주인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앞에서는 몸과 느낌과 마음의 법이 얻을 수 없는 것임을 특별히 관하였으니, 이제 다시 4념지(念止)를 총괄하여 관하여도{중에서도} 주인을 얻을 수 없으며 개별로 관하여도 주인을 얻을 수 없다{이곳을 여의고 구하여도 얻을 수 없음을 총체적으로 관한다}. - ↑ 구마라집 한역(T.614).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하권. 대정신수대장경. T15, No. 614, CBETA:
T15n0614_p0279a18║若常不可得,無常亦不可得;若常應當常苦
T15n0614_p0279a19║常樂,亦不應忘;若常有神者,無殺惱罪,亦無
T15n0614_p0279a20║涅槃;若身是神,無常身滅,神亦應滅,亦無後
T15n0614_p0279a21║世,亦無罪福。如是遍觀無主,諸法皆空不自
T15n0614_p0279a22║在,因緣合故生,因緣壞故滅,如是緣合法,是
T15n0614_p0279a23║名法念止。 - ↑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K.991, T.614). 《좌선삼매경》 하권:
만일 항상함[常]을 얻을 수 없다면, 무상(無常)도 역시 얻을 수 없다. 만일 항상하다면 마땅히 항상 괴롭고 항상 즐거워서 역시 마땅히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항상 정신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죽임도 괴롭힘도 죄도 없고{살뇌죄(殺惱罪)가 없고} 역시 열반도 없으며, 만일 육신이 바로 정신이라면 무상한 몸이 없어지면 정신도 역시 없어져야만 하며, 또한 후세도 없고 죄와 복도 없다.
이와 같이 두루 주인이 없음을 관하면, 일체의 존재는 모두가 공이며 자재하지 못해서, 인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생기고 인연이 무너지기 때문에 없어진다.
이와 같이 인연이 화합하여 법이 되니, 이것을 법념지(法念止)라고 한다. - ↑ 가 나 다 구마라집 한역(T.614).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하권. 대정신수대장경. T15, No. 614, CBETA:
T15n0614_p0278c29║應知心受苦樂、
T15n0614_p0279a01║受不苦不樂。云何心?是心無常,從因緣生故。
T15n0614_p0279a02║生滅不住,相似生故,但顛倒故,謂是為一。本
T15n0614_p0279a03║無今有,已有還無,是故無常。觀知心空。云何
T15n0614_p0279a04║為空?從因緣生,有眼有色,可見憶念,欲見如
T15n0614_p0279a05║是等,和合眼識生。如日愛珠,有日有珠,有
T15n0614_p0279a06║乾草牛屎똥 시,眾緣和合,於是火生。一一推求,火
T15n0614_p0279a07║不可得,緣合有火。 - ↑ 가 나 다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K.991, T.614). 《좌선삼매경》 하권:
마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고 또한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는 것도 받는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무엇이 마음인가?
이 마음은 무상(無常)하여, 인연을 쫓아 생겼다가 멸하는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등류 상속하여 생겨나기[相似生] 때문에, 이를 알지 못하는 전도된 인식으로, 항상하는 하나의 존재가 있다고 여겨 '마음'이라고 이름붙인 것일 뿐이다. 본래 없다가 단지 지금 있는 것[本無今有 = 空卽是色]이고 지금의 있음이 지나면 없음으로 돌아가는 것[已有還無 = 色卽是空]이다. 그러므로 무상하다.
마음의 본성을 관찰해 보면 공(空)임을 알게 되니, 무엇을 공이라 하는가?
공이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을 말한다.
눈이 있고, 물질이 있고, 눈이 볼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념(念)이 있고, 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서 이와 같은 것들이 다 화합할 때 비로소 안식이 생긴다. 마치 해가 돋보기를 사랑함이 있고, 해가 있고, 돋보기가 있고, 마른 풀이 있고, 쇠똥이 있어서 이 모든 인연이 화합하여 거기에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다. 하나하나를 미루어 찾으면 불은 얻을 수 없지만, 모든 인연 즉 조건이 합하여 불이 있다.{마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받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이 마음인가?
이 마음은 무상(無常)하여 인연을 좇아 생기기 때문에 생기고 없어져 머물지 않는다. 인식이 대상에 일치하고 대응하여 일어나기[相似生] 때문에, 다만 뒤바뀌었기 때문에, 이것을 항상하는 하나라고 말할 뿐이니, 본래는 현재의 존재[今有]도 없고 과거의 존재[已有]도 또한 없다. 그러므로 무상이다.
마음의 본성을 관찰해 보면 공(空)임을 알게 되니, 무엇을 공이라 하는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이다.
눈이 있어서 물질이 있음을 볼 수 있고 기억해서 보고자 하니, 이와 같은 것들이 화합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마치 해가 구슬을 사랑하여 해가 있고 구슬이 있으며, 마른 풀과 쇠똥이 있어서 뭇 인연이 화합하여 여기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으니, 하나하나를 미루어 찾으면 불을 얻을 수 없지만 연(緣)이 합하여 불이 있다.} - ↑ "嚴". 네이버 한자사전. 2024년 5월 18일에 확인.
嚴 엄
엄할 엄
부수 口 (입구, 3획)
모양자 吅(부르짖을 훤) + 𠪚(험준할 음)
1. 엄하다(嚴--: 매우 철저하고 바르다)
2. 혹독하다(酷毒--)
3. 엄격하다
4. 엄밀하다
5. 지독하다(至毒--)
6. 빈틈없다
7. 심하다(甚--: 정도가 지나치다)
8. 급하다(急--), 절박하다(切迫--)
9. 존경하다(尊敬--)
10. 엄숙하다(嚴肅--)
11. 모질다
12. 계엄(戒嚴), 경비(警備)
13. 아버지, 부친(父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