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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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구산(禪宗九山 · Nine Mountain Monasteries[1])은 남북국 시대신라 때부터 시작되어 고려 태조 때 완성된 불교 선종(禪宗)의 구산문(九山門)을 가리킨다.[2]

중국에서 성행한 달마(達摩)의 선법(禪法)을 이어받아 한국 선종의 종풍(宗風)을 일으킨 아홉 산문을 가리키는 것으로,[2] 가지산문 · 동리산문 · 봉림산문 · 사굴산문 · 사자산문 · 성주산문 · 수미산문 · 실상산문 · 희양산문이다.[2][3]

이후 이들 9산문은 선적종(禪寂宗)에 속하게 되며 의천(義天)이 만든 선종 천태종(天台宗)에 대립하였다가 조계종(曹溪宗)으로 개칭되어 선종 2종파 중의 하나가 되었다.[2]

구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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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의 9산은 다음과 같다.[2][4][5]

  1. 가지산문(迦智山門)
    설악산에서 도의(道義: d. 825)와 염거(廉居 ?-844)의 법을 배운 제자 체징(體澄: 804-890)이 837년에 당에 건너갔으나 실망하고 840년에 신라로 돌아와서 장흥가지산(迦智山)에서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고 도의의 종풍을 떨쳤다. 이로써 선종 9산의 일파로 가지산문이 최초로 성립되었다.
  2. 실상산문(實相山門)
    홍척(洪陟: fl. 830)이 당의 지장(智藏: 735-814)에게서 배워와(826) 남원지리산 실상사(實相寺)에서 실상산문을 열었다.
  3. 희양산문(曦陽山門)
    도헌(道憲: 824-882)은 준범(遵範) · 혜은(慧隱)의 법맥을 받아와 문경봉암사(鳳岩寺)에서 희양산문을 열었다. 도헌의 법손 정진대사(靜眞大師) 긍양(兢讓, 878-956) 대에 이르러 실질적인 산문의 형태를 띠게 된 것으로 봐서(935, 태조18년) 희양산문의 개산을 마지막으로 9산 선문이 정립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4. 봉림산문(鳳林山門)
    현욱(玄昱: 787-868) · 심희(審希: 856-923) 등에 의해 창원봉림사(鳳林寺)에서 봉림산문이 형성되었다.
  5. 동리산문(桐裡山門)
    혜철(惠哲: 785-861)에 의해 곡성태안사(泰安寺)에서 동리산문이 형성되었다.
  6. 성주산문(聖住山門)
    무염(無染: 800-888)에 의해 보령성주사(聖住寺)에서 성주산문이 형성되었다.
  7. 사자산문(獅子山門)
    도윤(道允: 798-868) · 절중(折中)에 의해 영월흥령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이 형성되었다.
  8. 사굴산문(闍崛山門)
    범일(梵日: 810-889)에 의해 강릉굴산사(崛山寺)에서 사굴산문이 형성되었다. 사굴산문도굴산문이라고도 한다. 이로써 신라말에 8산이 형성되었다.
  9. 수미산문(須彌山門)
    이엄(利嚴: 869-936)에 의해 고려초에 해주광조사(廣照寺)에서 수미산문이 열려서 9산 선문이 정립되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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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기의 선종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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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대 경덕왕(재위 742∼765) 때에까지 활발했던 신라 불교는 그 후 점점 침체되어 갔다.[6] 이 무렵에 직절 간명한 선(禪)불교가 중국에서 들어오게 되었다.[6] 이 새로운 선풍(禪風)은 중국에서 달마 이래 종풍이 확립되어 독특한 선종(禪宗)으로 성립 · 발전된 것이다. 중국의 선종이 6조(六祖) 혜능(慧能)에 이르러 남북으로 나뉘면서 그 기세가 극성할 무렵 신라 학승들이 선법을 배워왔다.[6] 북선(北禪)은 흔적만 남을 정도로 미미했지만, 6조 혜능의 남선(南禪)은 크게 일어나 신라의 선종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6] 그러므로 한국에 전해진 선법은 6조 혜능의 법손들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 첫 전법자가 도의(道義)이다.[6] 그는 선덕왕(宣德王) 5년(784)에 당으로 가서 마조(馬祖) 도일(道一)의 고제자 서당(西堂) 지장(智藏)에게서 법을 얻고 현덕왕 23년(831)에 귀국, 선법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라에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설(魔說)이라고 거부했다.[6] 그래서 도의는 설악산에 은거, 그 법을 제자 염거(廉居)에게 전하니 염거는 다시 체징(體澄, 804∼880)에게 법을 전했다.[6] 이렇게 해서 9산선문(九山禪門)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6]

고려 전기의 선종 구산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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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는 불교를 외호하는 데 있어서 종파에 차별을 두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무인적인 성격에서 자연 선종을 좋아하여 선승(禪僧)에게 귀의,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제도는 이때부터 시작됐다.[7] 958년에 관리등용을 위해 과거제도를 쓴 데에 견주어, 승려의 위계질서를 가리려고 승과(僧科)를 설치했다.[7] 이것은 승려를 존경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 그들을 통제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7] 신라 말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9산선문은 고려에 와서 이엄(利嚴, 866∼932)의 수미산파의 성립으로 마침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7]

고려 중기의 선종의 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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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구산의 성립에 따른 선법의 영향으로 여러 종파의 교학이 빛을 잃은 듯했으나 화엄교학만은 그 세력을 잃지 않았다.[7] 남북국 시대에 의상이 화엄을 널리 펼친 이래 끊임없이 연구되어 고려에 계승되었다.[7] 화엄교학은 고려조 전체를 통해 선종이나 교종을 막론하고 널리 연구되었던 것이다.[7] 그것은 대승보살의 실천적 행동을 강조한 사상이었기 때문이다.[7] 고려시대에는 왕자들의 출가가 많았는데, 의천(義天: 대각국사(大覺國師), 1055∼1101)은 문종의 제4왕자로 11세에 출가, 영통사의 왕사 난원(爛圓)에게서 화엄을 배웠다.[7] 그는 송(宋)에도 유학하였으며, 그때 천태학(天台學)을 전수받고 귀국 후에는 천태교관(敎觀)을 널리 강설했다.[7] 그는 또 교장도감을 설치, 국내외의 논저(論著)를 널리 수집하여 속장경(續藏經)을 출판했다.[7] 고려는 초기부터 선(禪)이 성하였으나 천태교학이 들어온 뒤부터 중기에는 재래의 선종은 심히 부진하게 되었다.[7]

고려 후기의 선종의 중흥과 조계종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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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교학이 들어온 뒤부터 고려 중기에는 선종은 심히 부진하였다.[7] 이때 고승 지눌(知訥, 1158∼1210)이 나와 조계선종의 중흥을 이루었다.[7] 많은 선승이 끊이지 않고 배출되어 고려불교의 후기는 선종 일색이 되었는데, 지눌은 9산선문의 교리를 종합하여 한국 불교의 정통인 조계종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7]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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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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